얼마 전에 지난 3년치의 법률신문을 한꺼번에 다 읽었다. 일반 신문은 잘 읽지 않더라도 법률가가 법조계 소식 정도는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3년치면 방대한 양이기에 주마간산 식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었던 점은 ‘사상초유의 사태’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년 후인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떠들썩하였던 일들이 사실은 별 것 아니었음이 확인된다. 당장 검찰이나 법원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검찰이나 법원은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단지, 해당 인물들만 사라졌을 뿐이다.
최근에는 메르스 공포가 우리나라 전역을 뒤덮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메르스에 감염되었고 실제로도 사망한 사람들이 다수 있지만 과연 중세 시대의 페스트같이 치명적인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만한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향해 미사일을 쏘아서 도시 하나가 쑥대밭이 된다거나 궤도를 이탈한 혹성이 지구를 향하여 돌진해오고 있다거나 몇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먹을 식수가 바닥이 난다거나 하는 경우 등,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상초유의 사태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극심한 공포에 떨어야 할 일이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일들이 대부분 하찮은 일들로 여겨질 것이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형사사건을 수임하면 구치소로 의뢰인을 면회가게 된다. 그들은 지금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집에서 잘 수 있다면, 집에서 샤워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술도 평생 마시지 않을 자신이 있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빼먹지 않고 운동도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기도 한다.
다른 죄수들과 같이 있기 싫다며(실제로는 두려워서) 독방에 있기를 원했던 의뢰인은 주말 이틀 동안 꼼짝도 못하고 그 좁은 방에 혼자 갇혀 있게 되자 미칠 것 같은 폐쇄공포증을 느껴서 발작을 일으켰고 결국 병동으로 가기도 했다. 죽음처럼 무서운 일은 아니겠지만 좁은 감옥에 갇혀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엄청난 일이다. 그러니 그 무서운 일을 피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것도 해낼 수 있다는, 다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오늘도 갖가지 걱정에 휩싸여 산다.
걱정을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 낫다. 치즈가 조금씩 줄어가고 있는 데도 아무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쥐보다는 언젠가는 치즈가 떨어질 수 있다고 걱정하면서 앞날을 모색하는 쥐가 생존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걱정들은 지나서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었다. 지난 3년치의 신문기사에서 사상초유의 사태로 언급되었던 큰 일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사실은 별 일 아닌 것으로 드러나듯이 말이다.
개개인의 입장에서 진짜 별 일은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고 있는 노화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목숨의 끝이다.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하여 인간은 막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늙어 보이지 않겠다고 얼굴에 보톡스를 넣는 사람들도 있지만 설사 그 보톡스가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늙어 보이지 않을 뿐이지 실제 늙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복거일은 2012년 간암 선고를 받고도 아무 치료를 받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계속하여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계신다. 얼마 전에 그분이 ‘역사 속의 나그네’라는 6권 짜리 장편 소설을 완간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후에 나머지 4∼6권을 쓰셨단다. “죽음과 경쟁한다고 생각하니 집중이 잘 됐다”라는 그 분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68세이신데 분당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 한채와 현금 수억원이 전재산이다. 그분은 골프 할 일이 있으면 두말 않고 나선다. 그리고 골프가 끝나면 빨간 딱지(클래식) 소주 1병을 맛있게 드신다.
그렇게 골프하러 다니다가 돈 떨어지면 집을 팔아서 시골로 이사 갈 거란다. 집 판 돈으로 소주나 가끔 마시면서 살 거란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고 계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지구가 망하는 큰 일이 일어나거나 내가 지금 당장 죽는 일이 아닌 한 대부분은 하찮은 일들이고 따라서 걱정할 일이 아니다.
지구가 망하거나 내가 죽는 일 같은 큰 일은 내가 걱정해본들 소용없다.
아침에 눈 떠서 그 날 할 일을 생각하고, 출근해서 그날 할 일을 완수하고, 저녁에 만족한 마음으로 퇴근하면 된다.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