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서릿발’에서 어원을 찾는 추상 같은 법조의 본고장 서초동과 세번의 인연이 있다. 신문사 노동조합의 파업이 길어지던 2012년 봄, 서울 서초경찰서 민원봉사실 마당에서 잠시 용역노동자로 살았다. 무노동 무임금의 어느 날 일당잡부 공고를 뒤적이다 이른 곳이 서초서였다. “게임을 하든 잠을 자든 의자에 엉덩이만 붙이고 있으면 일당이 5만원”이라 했다. 근로의 정체는 서초서 관할 대기업을 대행해 온종일 줄을 지키며 사옥 주변 집회신고를 선점하는 일이었다. 구인공고를 낸 이는 면접을 보자면서도 구직자의 경력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대신 “기자가 찾아와도 절대 인터뷰에 응하지 말라”는 당부만 되풀이했다.

“불법은 아닙니까?” 곧장 출근 서명을 받던 이는 ‘장난하느냐’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여기가 경찰서고, 여기가 서초동인데 불법은 무슨…” 하긴 감히 어느 안전(案前)이었겠는가. 고개를 틀면 대검찰청과 대법원이었고, 길 건너엔 서울고검 신청사가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집회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유령집회 신고는 법의 테두리 안쪽이었고, 용역들은 오가는 율사(律師)들 앞에서도 고개를 묻지 않았다. 때론 속상한 노동조합 사람들이 찾아와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다. 그들이 행렬을 향해 “젊은 사람들이 사지육신은 멀쩡해 가지고…”를 찾으면, 용역들은 “자기네들은 삼성을 이기나”하면서도 돌아보지는 못했다.

명색이 파업노동자라 그랬는지 게을러서 그랬는지 용역 일을 오래 잇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초동에 매일같이 나올 일은 금세 다시 생겼다. 한동안 살던 서울 신림동 자취방의 전세금에 탈이 나 서울중앙지법에 반환청구소송을 낸 까닭이었다. 전세금을 올릴까봐 집주인이 보이면 멀리 돌아가면서, 딴에는 꽤나 약삭빠르게 사는 줄 알았다. “한 달 안에 전세금을 내 주겠다”는 약속만 믿고 냉큼 이사했다는 말에 만나는 사람마다 혀를 찼다. 뒤늦게 떼어본 등기부등본에 근저당, 가압류 등 무서운 한자어가 가득했다. ‘임차인 대항력’ ‘소장 작성법’ 따위의 말을 인터넷 검색창에 넣으면서 “이런 내가 무슨 기사를 쓰겠는가” 참담하게 중얼거린 기억이 난다.

법원 민원실 직원이 읊어주는 대로 필요한 절차를 일일이 종이에 받아 적었다. 뒤늦게나마 보증보험에 들고 공탁금을 내는 한편 온갖 서류를 만들러 뛰어다녔다. 서류의 발급처나 준비물은 물론 명칭조차 이해 못하는 젊은이가 퍽 답답했을 것이다. 순번을 기다려 각종 증명원 발급을 신청하고, 그 때마다 인지를 사러 우체국에 가고… 법의 도움이 절실한 주제에 속으로는 ‘대국민 법률서비스가 이래서야’하며 서초동 문턱을 원망했다. 겨우 연락이 닿은 집주인에게는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새된 소리를 했다. 공탁금을 돌려받으려 담보취소 결정문을 제출할 때엔 법원 전산망이 잠깐 멈췄는데 그렇게 조마조마할 수가 없었다.

함부로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를 내미는 듯한 서초동에 돌아오고픈 맘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법 없이도 살 사람은 못 되는 모양인지, 지난해 가을부터 서울중앙지검에 출입하고 있다. 용역 시절 완공을 구경하던 하얀 서울고검 1층 기자실이 요즘 출근 장소다. 새 터전에서 가까이 보이는 길 건너 옛 일터에는 더 이상 집회신고 대행 행렬이 없다. 아마도 유령집회 신고를 방지하는 내용의 집시법 개정안이 발의된 영향일 것이다. 불안했던 그 시간들이 어딘가에 새겨졌는지, 2호선 서초역에 내리는 아침이면 아직도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다. 법원에 들를 때엔 간절한 마음으로 동분서주하던 때가 떠올라 몸가짐이 단정해진다.

매일 닥치는 일이지만, 법의 함수로 세상을 미분해 신문에 올리는 일은 매번이 어렵고 두렵다. 그래서인지 기사를 넘기고 난 저녁에는 선후배 동료들과 서초동에서 술도 많이 마신다. 한때는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명한 서초동 주점 3곳을 이니셜로 줄세워 ‘법조기자의 ABC 코스’라 부르며 찾아다녔다는 말도 들었다. 사석에서라도 법조인과 흉금을 털어놓으려는 목적이겠지만 법조기자끼리 나름의 어려움을 위로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극도의 보안과 기사 경쟁, 첨예한 이해관계와 명예훼손 소송의 위험 속에서 그저 조금씩 쓸 수 있는 법조팀엔 선뜻 오려는 기자가 드물다.

오래 법조기자로 살아온 선배는 인사가 나도 이내 서초동에 돌아오는데, “참전 군인이 사회 부적응으로 계속 전장을 찾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를 듣는다. 생각해 보면 이 묘한 중독성엔 유서가 깊다. 괴테는 1770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법학은 메르제부르크 맥주 같다. 처음에는 치를 떨지만 1주일만 마시면 뗄 수 없다”고 적었다. 인류의 대문호에게 1주일이 걸린 일, 기자에게는 도대체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할까. 서초동에 처한 동안 법리는 놔두어도 맥주 맛은 깨달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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