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해외로 여름휴가를 갔을 때 일이다. 호텔 체크아웃 전 짐을 쌀 때 분명히 현지에서 구입하였던 새 지갑을 박스 채 넣은 것으로 기억하였는데, 귀국 후 서울 집에 도착하고 보니, 박스만 있고 내용물인 지갑은 온데간데 없어 매우 당혹스러웠다. 혹시나 방안에 두고 나왔나 싶어 현지 호텔에 전화를 걸어 체크아웃 날짜와 방 번호를 알려주고, 청소할 때 방 안에 지갑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당시 호텔 직원은 ‘확인 후 연락주겠다’면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지갑이 발견되었는지 여부’만 얘기해주면 용건은 끝났겠지만, 그 전에 앞서 나에게 말 한마디를 건넸다.

“속상하시겠어요.”

결국 지갑은 찾지 못했지만(지금도 어떻게 도난당한 건지 의문으로 남아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호텔 직원의 말 한마디는 내 마음을 훈훈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그 사건 이전에는 의뢰인을 만날 때마다 ‘어쩌다가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소송 당사자가 되었을까’라는 안타까움이 앞서더라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제3자가 되어 객관적으로 사건을 파악하고 준비서면, 답변서, 변론요지서 등 각종 서면을 열심히 작성하는 것에만 몰두하였는데, 그 후 사건에 이르게 된 배경에도 깊이 관심을 갖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다독이면서 배려하는 방법을 조금씩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민사소송의 당사자, 사기사건에 휘말린 고소인, 형사사건 피고인, 이혼사건 당사자인 의뢰인 등 맡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한마디 말을 건네게 된다.

“속상하시겠지만, 앞으론 우리 편이 한명 더 늘었으니, 함께 고민해봅시다.”

이런 경우 변호사는 차가운 인상으로 냉정하게 업무를 처리한다고 인식해왔던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한편 깊이 고마워하기도 하여 그 후 사건들이 원만하게 진행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의뢰인들이 변호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은 둘째치고라도, 첫째로는 소송에서 승소하고 무죄판결을 받는 것일 터, 변호사로서, 프로로서 부지런히 재판과 접견을 다니고, 서면작성 등 본연의 임무를 다하면서 꾸준히 의사소통해야 함을 유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억나는 의뢰인이 있다. 회사의 경영 실패로 매출이 악화되고 손실이 늘어나자 이에 분노한 사장이 ‘너 나가!’라는 모욕적인 언사와 징계해고를 거쳐 회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사한 바람에 한 가정의 가장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회사는 보복성 조치로 이렇다 할 재산도 없는 의뢰인을 상대로 수억원대의 소송을 제기하고, 업무상 배임 등 형사고소까지 하는 등 각종 악재가 한꺼번에 닥치게 되어 상담 당시 매우 위축되고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아도, 그 원인은 결재라인의 상위 결재권자로서 전결권자인 경영진들의 판단 잘못이 원인일 뿐, 과장 직급에 불과한 의뢰인에게 책임이 돌아갈 상황은 아니었다. 이에 소장에 첨부된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 뒤, 회사가 무리하게 거래처와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환율이나 시세변동에 따라 손해가 될 수도 있는 거래구조임을 감수하고 계약을 체결한 정황을 포착하였다.

이에 준비서면에서, 이 사건의 경우 원고 회사의 결재방식에 비추어 과장인 피고에게는 결정권한이 없다는 점과 아울러 계약서 제9조 해석상 미리 대금을 지급하고 외국에서 수입한 물품을 나중에 거래처가 인수를 거부하는 경우 그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이 없어 그대로 그 손해를 원고 회사가 고스란히 부담하는 내용으로 규정되어 있는바, 애초부터 경영진이 사업위험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게 된 데 기인한 것이므로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인 원고 회사의 귀책사유로 인해 발생한 것이고 의뢰인인 피고와 손해 발생 간 상당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을 부각시켜 민사소송에서는 원고 청구 기각, 진행 중이던 형사소송에서는 위 민사소송 결과를 참조하여 다행스럽게도 혐의 없음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사건이 종결된 후 그 의뢰인은 “그 당시 너무 당황하고, 기분도 나빴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는데 변호사님께서 상담을 하던 중 ‘과장님 잘못이 아니에요’라고 했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는데 큰 힘이 되었노라”며 감사 인사를 하였다.

변호사로서, 하루에도 몇번씩 상담과 재판을 통해 가지고 있던 재산이든,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든, 깊이 신뢰하였던 지인이나 인간관계이든 소중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에게 정확한 법리와 신속한 해결방법을 제시하기에 앞서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면, 그 후 결과가 잘되면 더욱 감사하게 되고, 비록 결과가 바라던 바와 다르게 나오더라도 당장은 실망스럽겠지만 마음 한 편으론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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