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법관연수를 받는 새내기 판사들의 큰 고민 중 하나는 늘 ‘판결문을 잘 쓸 수 있을까’였다. 그런 판사들에게 정색하면서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최근에 판결문작성시스템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몇 가지만 입력하면 컴퓨터가 기록을 읽고 판결문을 작성한다, 좋은 세상이다’라고 장난을 치던 때가 있었다. 순진한, 제법 많은 신임판사가 깜빡 속아 넘어갔기 때문에 술자리의 괜찮은 안주였다. 판결문작성시스템이 형식적 기재사항을 생성해 주었고, ‘몇 가지’만 기재하면 판결문이 완성되니, 컴퓨터가 기록을 읽는다는 것만 빼고는 큰 거짓말도 아니었다. 또 실제 판결이유를 작성하는 시스템이 개발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이기도 했다.

로봇이 기사를 작성하는 로봇 저널리즘이 점차 보편화 되고 있다. 2014년 7월 AP통신은 150~300단어 정도의 실적기사(연간 3000건 정도)는 로봇에게 맡겼고, 올 3월부터는 스포츠기사의 일부도 로봇이 작성하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로봇이 쓴 기사를 골라 ‘더 롱 굿 리드(The Long Good Read)’라는 주간지를 내는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조만간 LA 다저스 전담 해설위원인 빈 스컬리를 로봇이 대체할 수도 있고, 주식 관련 기사 역시 로봇이 쓰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지난 5월 네덜란드 틸버그대학의 연구팀이 로봇과 기자의 기사에 대해 전문성과 신뢰성에 초점을 맞추어 기자들과 일반인에게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기자들은 로봇기사의 전문성에 후한 점수를 주었지만, 신뢰성은 낮게 평가하였다.

반면, 일반인은 전문성과 신뢰성에 있어서 양자 별반 차이가 없다고 인식했다. 이 정도라면 이제 로봇기자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물론 로봇의 활동영역은 기초데이터가 풍부하고, 로봇알고리즘이 데이터로 측정할 수 있는 영역으로 한정된다. 스포츠스타의 불륜이 축구경기에 영향을 미친 것을 알고리즘이 분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봇기자 시대에 인간기자의 역할은 무엇인가가 제법 큰 화두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양형기준제는 재판에 알고리즘이 도입된 사례의 하나이다. 과거의 양형데이터를 기초로 양형위원회가 내린 규범적 판단에 따라 양형기준이 제시하는 규칙과 절차를 따라가면 문제가 해결된다. 양형은 이제 프로그램(로봇)에 맡기는 것이 수월한 영역이 되었다.

양형기준제가 도입될 무렵 법원에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하나는 양형기준제가 법관에게 과도한 영향을 주어 적정한 양형을 그르칠 것이라는 우려였다. 다른 하나는 양형기준이 양형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형사재판이 수월해질 것이라는 기대였다. 전자의 걱정이 부장판사 이상의 압도적인 견해였다면, 후자는 단독판사 이하의 다수설이었다. 후자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전자는 현실로 나타났다. 양형기준제는 과거의 데이터에 근거한 과거의 판단 결과이기 때문에 현재 눈앞에 있는 피고인의 특별한 사정을 놓칠 수 있다. 그 특별한 사정이 양형에 있어서 고민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데, 양형기준은 그 고민을 차단하는 경향이 있다.

양형기준이 만들어진 다음에 어느 법관연수에서 미국 판사가 양형기준을 이탈한 이유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 미국 판사는 양형위원회에 보고하는 이탈사유를 이렇게 적었다. “더 나은 정의를 위하여!”

비단 양형만이 아니라 논리칙이 적용되는 많은 재판영역에서 알고리즘이 도입될 수 있다. 실제 미국에서는 간접사실을 유형화하여 규칙을 만든 후 그 규칙에 따라 ‘Yes or No’를 반복하면 요건사실의 존부를 판단해 내는 알고리즘이 연구되었다. 이 이론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향후 컴퓨터공학과 뇌과학, 논증철학의 결합·발전은 제법 세련된 추론(推論)로봇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로봇의 장점은 확실하다. 어느 로봇에게 일을 맡겨도 동일한 결과를 내고, 인간보다 훨씬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이 로봇의 가치(형식적 형평성, 신속성, 효율성)는 아마도 법원의 오랜 흐름과 맞닿아 있다. 그 귀결은 관료화된 몰개성, 비인간화일 것이다.

판결문을 읽어보면 그 판사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등장하는 인물에게서 ‘사람의 냄새’가 나야 비로소 공감할 준비가 되는 것처럼, 판결문에서 ‘사람의 냄새’를 느끼지 못했을 때 그 판결은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의 냄새’는 단지 온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분쟁의 근원 속에 담겨 있는 동시대인의 고민을 함께하는지의 문제이다. 로봇으로 대체 가능한 정도의 깊이를 보이면서 신뢰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판사는 ‘좋은 재판’을 하기를 희망한다고 믿는다. ‘좋은 재판’은 사람의 욕구와 고통을 읽고 그것을 함께 느낄 때에 시작된다.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기본적 윤리를 확인할 수 있는 법정이 우리 앞에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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