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 함순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헤르만 헤세 덕분이었다. 헤세가 발표한 서평들을 한 군데 모아 출간한 책에서 나는 다소 생경하고 이국적인 이름, 크누트 함순을 만났다.

헤세는 그를 가리켜 ‘내 가장 아름다운 시절 내가 좋아하던 작가’라 하였다. 심지어 헤세에게 그는 실수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거나 싸우다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수는 있어도 늙을 리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크누트 함순이 어떤 작가인지 몹시 궁금해졌고 왠지 그의 작품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것의 원시적인 생명력이 충만할 것만 같았다.

크누트 함순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인데 가난과 학대로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직업을 전전해야 했던 그는 고단한 삶의 경험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토마스 만 같은 이는 그를 도스토옙스키와 니체의 후예라고 불렀다.

그러나 노년에 히틀러를 찬양함으로써 그는 모든 명예를 잃고 추락하게 된다. 그의 굴곡진 삶의 궤적이 나를 주저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헤세를 믿어 보기로 하였다.

내가 선택한 책은 크누트 함순이 작가로서 처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굶주림’이었다.

“내가 크리스티아나에서 굶주림에 배를 움켜쥔 채 방황하던 시절이었다”로 시작된 소설은 단숨에 나를 빨아들였다. 특별한 사건도, 재미난 이야기도 없었지만 나는 마치 ‘굶주림’에 굶주렸던 사람처럼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어느 이른 아침, 문짝은 허술하고 벽은 신문지와 광고지로 도배된 다락방에서 그가 눈을 뜬다. 나는 그 비좁고 더러운 방 한쪽 구석에 숨죽이고 서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닳아 해진 것을 감추려고 그가 바지 무릎에 물을 찍어 바르고 빈속으로 집을 나설 때 나도 서둘러 그를 따라 나선다. 몇 걸음 뒤에서 그를 쫓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현기증과 구토 속에서 크리스티아나(현 오슬로)를 허둥허둥 떠돌기 위해서다.

그는 글을 써서 신문사에 넘기고 원고료를 받아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영감이 번득여주어 괜찮은 글이라도 하나 나오면 식비와 집세를 해결할 약간의 돈이 그의 손에 들어온다.

그에게는 먹을 것과 잘 곳이 날마다 필요하건만 영감은 일상적으로 번득여주는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은 늘 불안정하다. 돈이 다 떨어졌는데 아직 편집장에게 보여줄 만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하면 그는 언제 끝이 날는지조차 알 수 없는 굶주림에 시달리며 그저 순간순간을 버텨야만 한다.

굶주림은 뱃속에서 창자가 뱀처럼 꼬이고 두뇌가 느릿느릿 머리에서 흘러내려서 결국은 텅 비어버리는 것과 같다. 더 이상 어깨 위에 머리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고 누군가를 바라보면 눈이 고정된 채 멍청하게 열려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편집장에게 보여줄 글도, 전당포에 맡길 물건도 바닥이 나고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자 그는 우발적으로 화물선에 올라타고 도시를 떠난다. 나는 그를 더 이상 뒤쫓지 못하고 부두에서 그가 탄 배가 멀어지는 것을 눈으로 배웅하였다.

책장을 덮고 숨을 고르며 무엇이 나를 이토록 그에게 빠져들게 하고 집요하게 그를 뒤쫓게 하였는지 되돌아본다.

굶주림으로 착란과 정신분열의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는 결코 자의식을 놓지 않은 사람이었다. 친구에게서 빌린 담요를 전당포에 맡기려다 거절당하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이런 천박한 짓거리를 하려는 욕망에조차 맞서 싸우느라 안간힘을 써야 할 정도로 자신이 타락했다고 여긴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끄러움도 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며 자책한다.

굶주림을 달래려고 소용도 없는 톱밥을 씹고, 개에게나 던져주는 뼈다귀를 빨아야 하는 처지인데도 말이다. 굶주림보다 더 지독한 자의식이었다.

나는 분명 그에게서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들 혹은 잃고도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았다. 그의 굶주림은 번득이는 영감이 없이도 당장의 먹을 것과 잘 곳을 걱정하지 않고 사는 일상의 민낯을 피할 데 없이 내게 들이대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고시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던 법대생의 다짐은 어느새 스러지고 타락을 타락으로 느끼지 못하는 변호사를 보았다. 중년의 게으름이 청년의 치열함을 밀어내고, 정의에 대한 굶주림이 밀려난 자리에는 무디어진 양심이 있었다. 짓밟힌 자를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외면하고도 자신이 한 일을 깨닫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변호사가 거기 있었다.

설령 그가 친구의 담요를 먹을 것과 바꾸었다 하더라도 그의 타락은 굶주림을 변명 삼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의에 굶주려하지 않는 변호사의 타락은 무엇으로 변명 삼을 수 있을까. 굶주림에 새삼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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