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했고 또 지금도 변하고 있다. 그것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한다. 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세상이 변한 것을 깨닫는다. 허망함을 느낀다. 그리고 거기에 묻어 있는 자괴감에 몸을 떤다. 자신이 ‘시간의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세상이 변하면 그 이전은 ‘옛날’인데 그것을 그저 세월의 흐름으로만 알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이다.

물론 세상이라는 것도, 역사라는 것도 한 순간에 뿌리째 일변(一變)하는 것은 아니다. 순식간에 앞으로 진보하는 일도 없다. 큰 변혁기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어딘가에 과거의 잔재를 남겨 놓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 과거의 잔재만 보고 있다. 그리고는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어마어마한 착각이다. 그 착각에서 깨어났을 때 ‘시간의 이방인’은 이미 ‘사상상의 이방인’이 되어 있음을 알고 놀란다.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머리속에 있는 ‘관념’이라는 것과의 괴리를 안고 있는데도 오로지 그 관념(고정관념 또는 선행관념)에 의해서 현실을 해석하고 비평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결과인 것이다.

문제는 세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상의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변화를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 하나 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 대신 진정이라든가 진심이라든가 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사람은 진정이니 진실이니 하는 옷을 입고 있으면 추위를 느낀다. 그 까닭에 언제나 ‘미신’이라는 옷을 입으려고 애를 쓴다. 그 옷은 따뜻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니 출세니 금전적 이득이니 하는 것이 바로 이 미신이라는 옷이다. 그 미신이라는 옷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세상의 변화가 눈에 보인다는 말이다.

변호사는 지금 미신을 찾고 있다. 진정이니 진실이니 하는 옷만으로는 추위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변호사에게는 경제적 윤택이라든가 사회로부터의 높은 평판이라든가 하는 고정관념이 있다. ‘누리는 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다.

이 고정관념은 이제는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변하고 말았다. 변호사라는 존재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시적(詩的) 행동자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는 절박한 현실과 마주 했을 때의 그 좌절감과 배신감이 변호사로 하여금 강박관념을 갖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강박관념은 비교지옥을 경험하게 한다. 변호사에 대한 과거의 평판과 현재의 위상과의 비교에서 오는 격차가 지옥의 감정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 지옥에서 세상에 대한 원망(怨望)과 질투(嫉妬)와 적의(敵意)를 맛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길은 젊고 똑똑하고 유능한 변호사를 정신적인 자살자로 몰아간다.

그러면 이 비교지옥에서 그리고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우리가 입고 있는 미신이라는 옷 즉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누리는 자’라는 고정관념 바로 그것을 버릴 때 비로소 길이 보인다고 믿는다. 이 미신을 버리는 데에는 끊임없는 ‘자기 교육’이 필요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고정관념을 버리면 세상의 변화가 보이고 세상의 변화를 읽으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한 마디로 이미 세상이 변했고 시대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 안에서 칼을 물속에 빠뜨렸다. 그 칼을 찾기 위해 칼이 빠진 곳을 뱃전에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물에 빠진 칼은 다시는 찾을 수 없다. 이미 배는 물살을 따라 흘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지금도 칼을 물에 빠뜨렸을 때 해 놓은 뱃전의 표시에만 눈을 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지금도 수도원적인 평화주의자의 길에서 편히 쉬려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하루 빨리 과거의 고정관념의 틀에서 헤매는 퇴행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지나친 위기의식은 망상을 낳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매사 위기의식에서 오는 집착심이 없으면 이룰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그른 얘기는 아니지 않는가.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의 한 귀절을 인용한다.

“사람은 어제 때문에 받는 구속이 크고 무겁다. 그러나 어제 때문에 받는 궤도와 이상은 한 아름다운 샘물로서, 크게는 대하로서, 인생의 먼 바다를 찬란히 흐를 수 있는 것이다.”

과거는 흘러갔다. 그렇지만 그걸 알면서도 지나간 추억에 매달려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다. 이제는 이런 넋두리도 할 만큼 나이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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