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가법 제5조의4 ‘장발장법’ 위헌결정 받아낸 정 혜 진 국선전담변호사

간통죄 위헌결정이 있었던 지난 2월 26일, 헌법재판소 보도자료에는 로스쿨 출신 1년차 변호사가 받아낸 또 하나의 유의미한 위헌결정이 게시됐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이하 ‘특가법’) 제5조의4. 절도전력이 있으면 빵 하나만 훔쳐도 중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여 ‘장발장법’이라고 불려온 조항이다. 해당조항의 위헌제청을 신청한 정혜진 변호사(수원지법 국선전담변호사)에게 뒤늦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정 변호사는 선배법조인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라며 한사코 자신을 낮추었다.

위헌요소를 발견했다고 해도 모든 변호사들이 시간을 들여 위헌을 다투는 것은 아니다. 법률사무에 적응하기 바쁜 1년차 새내기 변호사라면 더욱 그렇다. 어떤 계기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하게 되었나.

작년 7월경 우연히 마약밀수입 가중처벌 규정인 특가법 제11조 제1항 위헌결정을 알게 됐다. 마침 당시에 ‘장발장법’, 즉 특가법 제5조의4로 기소된 상습절도 사건 몇개를 맡고 있었다. 국선전담변호사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배고파서 라면 등을 훔친 소위 ‘생계형 잡범’들이 상습이라는 이유로 특가법 적용을 받아 지나치게 높은 형량을 받게 되는 경우를 많이 접했다. 특가법 제11조 위헌결정을 보고 문득 이 법리대로라면 특가법 제5조의4도 위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형의 하한이 너무 높지 않나 좀 부조리하지 않나 하는 느낌만 가지고 있었는데, 유사한 선례가 나와 이 조항도 위헌결정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덕분에 소위 ‘장발장법 변호사’로 유명해졌다. 소회가 어떤가.

솔직히 ‘무임승차’했다는 기분이 강하다.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사안이었는데, 누구도 먼저 하지 않아서 주목받게 된 것뿐이다. 오히려 그때까지 제청신청이 없었던 게 의아했다. 당시에 내가 ‘1년차 변호사’였기에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뭣 모르는 초짜변호사였기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과감하게 도전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주목을 받게 되니 송구스럽다. 결정 후 언론과 SNS에 내 소식이 알려지면서 20년간 연락 없던 지인에게 연락이 오더라. 이렇게 변협신문 인터뷰도 하게 되고(웃음). 전국 교도소에서 편지도 많이 받았다.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정 변호사의 노력으로 1980년 신군부 국보위가 ‘사회정화’ 명분으로 신설했던 해당조항이 35년 만에 효력을 잃었다. 부당하게 높은 형을 받은 자들이 권리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됐다. 기존부터 공익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있었나.

그런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재판연구원을 마치고 변호사로 형사법정에 서보니 판사·검사·변호인이라는 3각 구도 안에 어떤 ‘게임의 규칙’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법조인들은 각자 법정이라는 게임 안에서 자기만의 롤(role)을 갖게 되는데 변호인의 역할은 무엇보다 피고인에게 가장 유리한 주장과 법리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이고, 그러다보니 위헌까지 다투게 된 것 같다.

경력이 독특하다. 15년 가까이 신문기자로 일하다 로스쿨에 진학했다고 들었다. 적지 않은 경력과 나이에 로스쿨 진학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대구지역 일간지 기자로 15년 일했다. 로스쿨은 차장 승진시기에 생각하게 됐다. 언론사 간부가 돼보니 열심히 기사만 쓰던 평기자 시절과는 많이 달랐다. 신문사 입장에서 편집방향을 결정해야 했고, 종이신문 입지가 줄어든 상황에서 광고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고귀한 척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기자 본연의 정체성을 벗어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상황이 나와는 맞지 않았다. 유학을 가야하나 하던 차에 로스쿨 도입 소식을 들었다.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지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운 좋게 입학했고 다행히 법공부가 꽤 잘 맞았다. 난 타이밍 덕을 많이 보는 사람이다.

로스쿨 졸업 후 서울고법 재판연구원을 거친 뒤 지금의 국선전담변호사가 됐다. 로스쿨 재학 중에도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다. 로스쿨 생활은 어땠나.

로스쿨 3년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기 중 하나다. 산을 깎아 세운 기숙사에서 경치를 만끽하며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비법대 출신인 것이 공부할 때는 더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 편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나이 많은 여자라서 동기들도 나를 섣불리 경쟁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웃음). 그러다보니 학기가 지날수록 성적이 좋아졌고 그게 또 재밌어서 더 열심히 했다. 법대 출신 동기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줬고, 기자 경험도 법공부에 도움이 됐다. 학교에서 평점 3.0 이상은 전액 장학금지원도 해주어서, 다행히 생활도 큰 문제없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사시존치 바람이 불면서 로스쿨 제도에 관한 관심도 높다. 로스쿨 출신으로서 로스쿨의 명암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달라. 사법고시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로스쿨 제도의 단점도 물론 있겠지만, 나는 명백히 로스쿨 수혜자라고 생각한다. 나이 많고 다른 분야에서 오래 일한 나 같은 사람에게 법조인의 꿈을 꾸게 해준 건 로스쿨이다. 사실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도 과장된 부분이 많다고 본다. 소득수준이나 집안배경이 성공률과 비례하는 건 비단 로스쿨만이 아니라 대학입시, 사법연수원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 보이는 현상 아닌가. 로스쿨에도 경제적 취약계층을 위한 ‘특별전형’ 제도가 있고 그 혜택을 받아 지금 훌륭하게 법조생활을 하고 있는 동기, 후배들을 많이 알고 있다.

사시는 정말 어려운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성공한 사시출신 법조인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사시의 부작용은 그에 만만치 않다. 성공률이 5%가 채 안 되는 게임에 젊은 시절의 모든 걸 바쳐야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다. 사시가 국민 모두에게 법조인의 기회를 열어준다는 말은 일견 맞다. 그러나 그 혜택을 실제로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로스쿨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실무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다. 이런 고민 때문에 변호사시험을 본 뒤 책을 쓰기도 했다(정혜진 변호사는 로스쿨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변호사시험 기록형 대비 교재를 쓴 저자로도 유명하다).

변호사 2만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선전담변호사 경쟁률도 치솟고 있다. 국선전담변호사 생활은 어떤가. 일하면서 좋은 점, 힘든 점은 무엇인가.

재판연구원 때는 정말 바빴다. 9시에 출근해서 일주일에 3번 이상은 11시까지 야근했고, 주말에도 하루는 반드시 나가야 했다. 힘들었지만 정말 많이 배우긴 했다. 로클럭 때 비하면 지금은 재판일정 외에는 내가 일정을 짤 수 있고 여가시간이 많아져서 좋다. 국선전담변호사 경쟁률이 치솟는 이유 중에는 이런 것도 포함될 거다.

물론 단점도 있다. ‘사건수임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수임의 고통’을 모르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선전담변호사는 법원에서 지정하는 매우 제한된 유형의 형사사건만 변호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주도적으로 하지 못한다. 어쩌다 인연이 되어 꼭 도와주고 싶은 사건이나 해보고 싶은 사건이 있더라도, 국선전담변호사 신분이기 때문에 섣불리 할 수가 없다. 법원장 허가를 받아 소송대리를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또 방대한 법률문제 중 제한된 측면만 보게 된다는 점이 제일 아쉽다. 고용안정이 보장돼 있지 않다는 점도 흠이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는가.

국선전담변호사 일을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일단은 하는 일에 좀 더 충실하려고 한다. 말씀드릴만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다만 지금껏 해온 것처럼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열심히 하다보면 또다시 어떤 변화의 타이밍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이 못 된다(웃음).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국민들 각자가 자기 소임을 다하는 것이 곧 정의이며, 그 기능들이 조화를 이루어 이상적인 국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정혜진 변호사는 신문기자, 로스쿨학생, 재판연구원, 지금의 국선전담변호사에 이르기까지 사심 없이 그때그때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 왔을 뿐이다. 변호인의 역할에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레 법률의 위헌까지 다투게 된 것 같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공익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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