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만100원. 국선변호활동에 대한 대가다. 내가 변호사로서 첫발을 내딛고 시작한 국선활동은 화폐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준 시간들이었다.

피고인 한씨. 양극성 정동장애자. 50대의 미혼. 전과 10범. 죄명은 모욕죄와 폭행죄. 그에겐 아무래도 실형이 선도될 것 같다. 자백으로 재판을 마무리 짓고 싶다. 그래야 다른 일들을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테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를 한번 만나잔다. 내가 근무한 사무실에서 대화를 하는 동안 두 가지 불신이 짙게 깔려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오빠에 대한 처절한 분노감 그리고 국선변호인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녀의 오빠가 지금까지 정신질환자로서 자신에게 행한 학대와 모진 수모는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정신질환. 겉으로 보기에 고요하고 차분해 보이는 그들의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응어리와 상처들이 일시에 분출되면 마치 불화산과 같다. 가족들의 모든 인생을 할퀴고 가족사에 상흔을 남기기도 한다. 지금 한씨가 의지할 가족은 단 한명의 오누이 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진 또 다른 불신은 국선변호인에 대한 불성실한 변론태도였다. 좋은 결과가 나오면 반드시 후사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스스로 불신을 지우려했다. 나는 그녀에게 적어도 7번방의 선물에 등장하는 교도소 수감자들의 탄원서를 전달하지 않는 국선변호인과 같이 하지는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첫 번째 기일은 증거신청과 함께 피해자들과 합의를 위해 한 기일 더 속행해달라는 요청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재판정에 나타난 피고인의 조력자가 있었다. 그를 지금까지 떠나지 않은 단 한명의 친구. 재판정에 나온 나에게 그는 피고인의 착한 성품과 정신질환으로 인해 이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주입시켰다. 또한 합의를 위한 절차를 묻기도 했다. 자신이 피고인을 위해 합의금을 지급하겠단다. 재판 이후로도 피고인의 여동생과 친구는 수시로 내게 전화하며 도움을 강청하였다. 귀찮을 정도로….

바쁜 변호사 업무 속에 덮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 같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일하는 동안 멈추지 않는다. 내가 피고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정신감정신청이었다. 두 시간에 걸쳐 진심이 듬뿍 담긴 정신감정신청서를 작성했다.

어떻게 쓸까? 양극성 정동장애가 조증과 울증 양극단 사이에서 감정이 기복한 극단적인 정신질환인 점과 우울증 때문에 故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몸을 던진 점을 들추어내며 무서운 질병임을 강조하면서 지금 피고인이 수감된 구치소에는 정신질환을 감정할 만한 의료인이 없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정신감정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재판이 열렸다. 담당 판사님은 정신감정신청서를 받아 들고 수일을 고민했단다. 고심끝에 공주에서 정신감정을 위해 대기중인 피고인이 넘쳐나는 점과 함께 ‘고단’ 사건은 중형이 아닌 점 등을 들어 취하를 권고하신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오랫 동안 지켜본 정신과 병동의 원장은 양극성 정동장애가 얼마나 무서운 질병인지 유선으로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수단이 현재로선 빈약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재판 종결과 함께 피고인 친구는 피해자에게 공탁을 한다. 판결의 선고일, 뜻밖의 결과를 맞이하였다. 피고인 집행유예. 진심이 통할 때 하늘도 감동한다는 벅차오름을 느꼈다.

검사측의 항소. 항소 재판부 항소기각. 항소기각 판결을 함께 들고 나오면서 피고인은 내게 밀면 한 그릇을 대접한다.

어떤 이들은 국선변호인이 필요한 이유는 판사의 재판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범죄 사실을 자백하지 않는 피고인들을 설득하여 자백하도록 유도하는 도우미가 필요해서라고도 한다.

그러나 나의 순진한 생각은 이와 다르다. 고아와 과부같이 자신을 의탁할데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국선변호인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선변호인의 존재가치를 무시하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엄연히 국가의 위임을 받아 변호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국선변호인은 적어도 재판정에서만큼은 국가기관이다. 검사와 판사만이 국가기관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은 심각한 착오다. 국선변호인이 있는 한 그 재판정은 삼권분립의 정신의 실현장이다.

수사기관의 수사상의 오류와 법률오인에 대해 정확한 피드백을 해주고 재판부에는 저울추의 무게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국선변호인이다. 그래서 국선변호인으로 설 때마다 나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다. 그 자부심과 함께 재판정에 들어선 넬슨 만델라가 한 첫마디를 떠올리기도 한다.

“내가 첫 번째 피고인입니다.” 나 역시 피고인과 같이 범죄 앞에서 연약한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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