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흘러나올 부모님의 잔소리(사무실은 유지하고 있느냐, 뉘 집 자식은 대형펌에서 월 1000만원을 번다더라, 그러게 왜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개업을 했느냐 등)를 피해, 주중의 미제사건들을 처리한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카페로 향하는 4년차 변호사의 주말. 새내기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뭔가 제대로 역할을 한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4년차’라는 단어가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법조인이 되고 싶어서 사법시험을 준비했었고, 그러다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여 3년을 공부한 끝에 겨우 달게 된 변호사 배지. 평범한 일문학도였던 내가 염원하던 법조인이 되었다는 기쁨, 환희, 법정에 선다는 설렘으로 만 3년을 정신없이 달려왔던 것 같다.

나는 법정에 처음 섰던 그 날 세 가지 결심을 했었다. ‘첫째, 불의 앞에서 신념을 잃지 않는 변호사가 되자. 둘째, 마음을 다쳐 내게 오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변호사가 되자. 셋째, 유능한 변호사가 되자’라고….

그런데 슬슬 일이 손에 익어갈 때쯤, 내가 누군가의 총알받이로 법정에 서서 판사님의 꾸중을 듣고 있으며, 사건내용도 파악하지 못 한 채 복대리라는 이름으로 재판 5분전에 기록을 받아 안고 뛰어가고 있으며, 일면식도 없는 의뢰인에게 누군가를 대신하여 사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상황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타성에 젖어 안이하게 변호사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직면하고는 오랜 고민 끝에, 3년차 여름, 고용변호사로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접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7월 7일 고용변호사를 그만둔 지 한달하고 보름만에,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동기 변호사들과 함께 지금의 ‘법률 사무소 세린’을 개업하였다. 개업 당시 몸이 병든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 가듯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특히 여성들)이 변호사 사무실을 조금 더 편하게(?) 찾을 수 있도록 이름부터 인테리어까지 짧은 기간 세심하게 신경을 썼고, 어느 정도 그 결실을 맺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낀다. 물론 재정적인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건비와 운영비를 공제하고 나면, 내 수중에 남은 돈은 고용변호사로 일할 당시 급여의 절반이 되지 않을 때도 있고, 이번달이 사건 노다지였다면, 다음달은 국선조차 들어오지 않는 식으로, 월급을 받고 다닐 때와는 다른 심장이 쫄깃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복한 변호사일 수 있는 이유는, 마음 맞는 동료들과 신념에 따라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지금 막 법조계에 발을 들인 청년변호사들은 업무수행에 있어 필요한 ‘공간’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외유명 보고에 따르면, 개인공간이 확보되어있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업무효율이 높고,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에 적게 노출된다고 한다. 변호사는 다른 직업보다 타인과의 접촉이 월등히 많은 직업이고, 사건마다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어야 하는 직업이기에 그에 따르는 변호사 개인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때로는 의뢰인에게 욕을 듣기도 하고, 멱살을 잡히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변호사 개인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지 생각만 해도 갑갑하다. 매년 약 2000명의 변호사가 쏟아져 나온다는 이유로 지금의 청년변호사들은 그들이 각기 속한 공간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상사의 업무 푸시, 의뢰인의 억지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물리적 공간도 공간이지만 조직 내 청년변호사들의 ‘심리적 공간’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점이다.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변호사의 ‘심리적 공간’이란 별게 아니다. 변호사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서면을 쓰고 변론을 할 수 있는 자유의 보장, 신입이라는 이유로 법정에 서서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을 자유, 어느 법인의 누구라는 허울뿐인 변호사가 되지 않을 자유, 연변이나 로변이 아닌 ‘대한민국 변호사’로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할 자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청년변호사의 ‘심리적 공간’ 확보를 위한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저렴한 몸값’의 변호사가 되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공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연변이니 로변이니 하는 유치한 파벌싸움으로 동료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려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그리고 내가 아는 우리 동료들이 대한민국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내 가족이 살아갈 대한민국이 조금 더 따뜻하고 평화롭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변호사들이 ‘청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푸르고 싱그러운 향기로 의뢰인들의 다친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세파에 시달려 힘들고 고된 나날들이 이어지더라도 처음의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언제까지나 푸를 수 있도록, 선배변호사님 및 대한민국 국민들의 따스한 관심을 부탁하는 바이다. 비상하라 청년변호사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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