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을 하다 보면 전혀 뜻밖의 판결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부 패소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건에서 전부승소나 다를 바 없는 일부 승소를 하여 뛸 듯이 기뻐하기도 하고, 못 해도 일부 승소는 할 것으로 기대한 사건에서 전부 패소하는 경우도 있다.

몇년 전 나는 전부 승소를 목표로 진행한 사건에서 일부 승소는커녕 전부 패소한 아찔한 경험을 하였다. 구두합의로 진행되어 입증이 어려운 부분에 대한 간접 정황증거도 충분히 제시하였고, 무엇보다 우리가 투자목적으로 지급한 내역이 분명하기 때문에 최소한 일부 승소는 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 생각했었고, 의뢰인에게도 그와 같은 소송전망을 모두 설명하고 진행한 사건이었다. 소송진행과정에서 담당재판부의 태도 또한 우리 측에 유리하다고 확신했다. 담당재판부가 심증을 드러내서가 아니라 오랜 기간을 소송을 진행하면서 가지게 된 변호사의 동물적인 감각이랄까? 아, 재판부도 우리 측 주장에 공감을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최종 변론기일 직전에 인사이동으로 인한 재판부교체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결론이 뒤바뀔 수 있는 사건은 아닌 것이 분명 확실한 사건인 것인데 말이다. 나는 뜻밖의 판결 앞에 분노 폭발하여 한참 동안 의뢰인에게 결과를 알려주지도 못할 정도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의뢰인에게 이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이 밀려왔다. 소송의 승패전망에 대하여는 최대한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하고, 진행을 결정한 이상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노력을 다하자. 만족스럽지 못한 재판의 결과를 받아 들고 의뢰인 앞에서 재판부를 탓하는 못난 변호사가 되지 말자. 그간 내가 믿고 기대온 나의 좌우명들…. 다 소용이 없어지는 순간이다.

전화를 하게 되면 결국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결과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재판부를 비난하고 말 것 같아, 이메일로 정중하고 건조하게 소송의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향후 항소심을 진행할 경우의 주장, 입증계획과 전망에 대해 장황하게 안내하였다. 이메일 수신확인이 되었으나 그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일단 항소장을 제출해 놓고 항소이유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메일로 항소진행 여부에 대하여 물어보아도 아무런 회신이 없고, 2주가 지나도록 그는 전화를 받지도 않고 전화를 하지도 않았다. 소송결과에 너무 낙담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평소의 그의 스타일이나 이 소송이 그에게 미칠 영향을 감안할 때 이 정도로 연락을 안 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싶었다.

그 후로도 몇주가 더 지난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그가 그동안 수고 많았다며 저녁식사나 하자고 했다. 더 미안한 마음에 1심 진행과정에 대한 분석과 항소심에서의 세세한 주장입증계획을 다듬고 다듬어 그와의 저녁식사자리에 나갔다. 그를 만나자마자 내 안에서는 ‘어떻게 이런 사건에서 항소를 하지 않을 수가 있냐? 1심 결과는 유감이나 항소하면 결과가 바뀔 수 있는 사건이다’라는 말이 그를 만나지 못한 기간 동안 압착되어 있다 그 순간 봉인이 풀려 부풀어 튕겨서 나오려는 풍선처럼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오랜만이라 그동안 잘 지냈느냐는 나의 안부인사에 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긴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여 아찔하였지만 매우 다행이고 아름답기도 한 이야기였다. 회사의 대표인 그는 한달여 전 저녁에 조금은 비즈니스적인 와인파티에 참석해 가볍게 와인을 한 두잔하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 새벽녘에 귀가를 하고 있었다. 광화문에서 자리를 파하고 신도시에 있는 그의 집으로 운전을 하여 가던 중, 어느 순간 갑자기 하얀 빛을 본 후 한참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보니,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 차머리를 처박은 채로 에어백이 터진 차에 있더라는 것이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착한 아주머니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차 뒤에 접근하여 그를 깨워주었고,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신고해준 119 구급대가 와서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졸음 운전 중이었고, 뒤에서 그의 차량 상태를 본 누군가가 신고를 했고, 그의 졸음운전은 중앙분리대와 부딪치면서 다행스럽게도 끝이 났던 것이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했고, 자신을 깨워준 천사와 같은 아주머니와 신고를 해준 이름 모를 천사와 달려와준 119….

그는 다시 받은 이 삶의 기회에 감사하며 자신도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베풀고 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소송상대방인 1심의 피고에게도 자신이 천사 노릇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준비해온 1심 소송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항소심에서의 진행계획의 세부상황을 한 마디도 꺼내보지 못한 채로, 그 인적이 드문 그 고속도로로 그 새벽에 그를 구하기 위해 급파된 그 아주머니 외 다수의 천사들의 존재에 대해 함께 신기해하고 감탄하면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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