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이동통신사 상담사와 통화하였습니다. 젊은 나이의 직원이 응대하고 있었습니다. 본인확인을 위한 질문에 응답하면서 나는 의례적으로 들릴 수 있는 질문들에 최대한 진지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과정이 고객과 상담사의 관계를 규정짓는 관문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피의자와 사법경찰관 사이의 인정신문과 같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절차입니다. 상담과 필요한 업무가 끝나고 나는 인사를 들었습니다. “고객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나는 짧은 순간 대답할 인사를 생각하였습니다. “예. 좋은 하루 되세요.”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인사하는 메아리 인사법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중년남자는 어떤 것이 예의 바른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중하지만 사무적인 태도와 말이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칫 친절한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간 상대방은 부담스러워지고 나는 오지랖이 넓은 푼수가 되거나 무례한 남자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문자가 왔습니다. “친절하게 문의 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나에게 돌아온 작은 보상이었습니다. 현대를 사는 남자들은 이런 칭찬에 익숙하고 그런 칭찬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점심시간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식당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중년 나이의 사람들을 마주칩니다. 예의 바른 청년변호사는 그 전단지를 다 받아들다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는 거의 한아름을 안고 있습니다.

나는 지하철 역내에서 어떤 사람이 가슴 앞에 글을 써서 들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살려주세요.” 그의 앞에는 모금함이 있었습니다. 나는 가던 길을 돌아서서 그의 앞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동행하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그래?” “살려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사람의 요청을 외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점심시간에는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강남대로의 횡단보도 앞에서 지방에 내려갈 차비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술이 덜 깬 것인지 너무 간절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감길 듯한 눈빛은 매우 간절하였습니다. “만원이면 되겠습니까?” “오천원만 더 주세요.” 이 순간 성냥팔이 소녀가 얼어 죽었다는 동화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장님이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고아원을 방문하여 회의실에서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밖에서 매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복도 밖으로 나가보니 몇살은 많아 보이는 아이들이 나이 어린 한 아이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사장님과 눈을 마주쳤는데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은 채 그저 맞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원장에게 물어보니 처음 고아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보통 며칠 동안 심하게 울다가 자신이 버려졌고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그 후로는 울지도 않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도움도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는 세상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의 고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여행 갔을 때의 일입니다. 유독 한국 관광객의 버스 앞에는 1달러를 요청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관광가이드는 다른 나라의 관광객 버스 앞에는 별로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러분, 저 아이들에게 1달러를 주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는 1달러가 저 아이들을 가정과 학교에서 이 거리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나는 누구에게나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살이는 관심과 무관심의 연속적인 매듭이 그 색깔과 밀도를 구성하는 것 같습니다.

지나친 관심과 끝없는 무관심은 세상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유리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을 학생들을 생각합니다. 구조대를 향하여 미소 띤 웃음을 보내고 있었겠지요. 그들이 절규하기 전에 우리가 미처 하지 못하였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 길들여졌다고 하더라도 친절한 마음이 정의감을 억누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둠의 세력과 악에 대하여 분노하여야 합니다. 그저 예의 바른 성품으로 분노를 잠재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와 분노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의뢰인들은 변호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나는 권리를 침해당하였습니다. 법이 헌법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이런 외침 속에서 변호사들이 그저 법령과 판례 속에 묻혀 지내지 않기를 원합니다. 마음속에는 따뜻한 평화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위법에 대한 분노가 있기를 고대합니다. 그 마음속의 평화와 분노가 일본의 종군위안부 문제, 세월호의 아픔 그리고 남북관계에서의 무력감을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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