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법원 조정이 연이어 있었던 날이었다. 수명판사가 말했다.

“오늘은 직접 두 당사자의 말을 듣고 싶네요.”

“언제부터 같은 일을 하게 되었나요?”

“수입을 올리는데에 누가 더 기여를 했나요?”

상대방 당사자가 직접 입을 열었다.

“당연히 제가 더 기여를 하였지요. 저 사람은 놀기만 하고 일한 적이 없습니다.”

일한 적이 없다는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의뢰인이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내가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데 놀기만 했다고 그래!”

가만두면 곧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 내가 나섰다. 의뢰인이 실제 일한 내용을 꼼꼼히 말하기 시작했다. 상대방 당사자의 한마디가 나를 자극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거짓말을 같이 하는구먼!”

“이미 서면에서 정리한 내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상대방 변호사도 거들고 나섰다.

“실제로 저희 의뢰인이 모든 일을 다 한 것이 맞습니다.”

상대방 당사자가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제대로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두들 서서히 기분이 상해 갔다. 그러나 양 당사자나 대리인은 알고 있었으리라. 적어도 약간씩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일할 때는 열심히 했습니다. 놀 때는 며칠씩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고요. 제가 며칠씩 나오지 않은 것에 저 사람 마음이 상했나 봅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 사람의 진짜 속셈은 벌어들인 수입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은 것에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 같다. 마음이 들킬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법이다.

“보세요. 본인도 인정하잖아요. 며칠씩 나오지 않은 적이 있다고. 그러면서도 일을 할 때는 열심히 했다고 거짓말을 하잖아요. 일을 열심히 하기는요!”

예상되는 상대방의 반응이다. 인정한 것이 도리어 화근인 셈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서운한 점을 애써 부각하고야 만다. 소송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해 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직업적인 습성이 만성으로 되어 가는 것 같다. 사람들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보게 되고, 칭찬보다는 비판이 우선임을 느끼게 된다. 부풀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먼저 수용하기보다는 우선 공격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음을 보게 된다. 문득 생각이 일었다. ‘이러다가 사람버리는 게 아닐까. 냄비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해고무효와 임금청구소송의 변론이 있던 날이었다. 해고의 경위를 보면, 해고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부당해고를 주장하는 내 입장이 유리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니 빨리 끝내고 싶은 사건이기도 하였다. 물론 상대방은 오래 끌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밝혀 주기를 원하는 사항에 대하여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다. 이러 저러한 주장도 그 대부분은 지연전략의 일환으로 보였다. ‘도대체 해도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있었던 소송 생각이 났다.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사건이었다. 변론이 끝났고, 상대방 대리인과도 수고 많았다며 인사를 나누었다. “변호사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후배격인 상대방 대리인이 당시 했던 말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 알았다. 내가 그 소송을 얼마나 많이 지연시켰는지를. 후배격인 상대방 대리인이 배운 것은 소송지연하는 방법에 관한 것임을 알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소송에 있어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기고 보자는 생각이 먼저다. 그 순간은 다른 사람의 처지가 들어올 여지가 없게 된다. 내가 먼저이고, 상대방은 나중이 된다. 시간은 여지없이 흐른다. 배려심과 인내심이 점점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은 나만의 기우일까. 변협에 각종 연수원이 개설되어 있다. 이 기회에 고전(古典)연수원도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나’를 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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