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그게 아니고요. 합의를 해도 이 사건이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고 판사님이 아주 유리하게 참고하신다는 거예요. 네네. 그러니까 판결 선고는 받으시는 거고요.”

나이 지긋한 어머니뻘 되는 여자 분이 동네 이웃과 폭력 사건에 휘말리셨다. 어머님 어머님 하며 정성껏 상담을 하고 충분히 이해시켜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전화하셔서 억울하다고 하시고 이미 물어본 거 또 물어보시고 또 물어보신다. 아휴~ 이것 참 표정관리가 안 되는 상황이지만 상대방은 중년의 여인이라는 점에서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말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일수록 자칫하면 마음이 상하셔서 더 수습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계속 딴 소리 하시는 당사자 분께 좀 땍땍거리기도 하고 단호하게 자를 줄 아는 내공이 생겼지만 지금 이 폭행 사건 피고인 어머님께는 그래서는 안 된다. 15분째 전화기 붙들고 있는 내 얼굴은 애써 힘겨운 미소를 걸쳐 놓고 안간힘을 쓰며 발그레해진 토마토 같아졌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더없이 상냥하게 최후의 일각까지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전화기 건너편 그 어머님은 마침내 변호사님 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전화하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남기신 채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 자신 슬며시 돌아보니 20대 동안 꾸역꾸역 공부 공부, 기껏 마쳤다 싶으면 또 공부하며 보낸지라 직접 경험한 삶의 폭은 넓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법조인의 길 여정 속에서 분투하다 보니 어느 새 이름 앞에 변호사가 붙어 현실에 내려서게 되었고 걱정 반 두려움 반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송사에 휘말린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세상에 별의별 일이 다 있구나 하며 내가 좀처럼 마주칠 가능성조차 희박한 사람들을 변호사 일을 통해 만나게 되었고 수도 없이 대화를 나눴다.

내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억울한 일들을 실제 겪은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같이 고민했다. 한숨을 폭폭 쉬며 내가 좀 더 똑똑해지면 이 사건을 더 잘 처리할 수 있을까 싶어 매일 매일 견과류를 챙겨먹고 카페인과 타우린의 힘을 빌려 애쓰는 나날이 흘렀다. 그렇게 쌓여가는 기록의 수만큼 간접 경험의 폭은 넓어졌고 나는 한뼘쯤 두뼘쯤 성숙해 가는 듯도 했다.

어느새 급하디 급한 성격이 조금은 느슨해졌고 불끈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던 다혈질 화법에도 필터가 생겼다. 조금 더 인내심이 길러졌고 같은 내용을 무한 반복 설명하는 것도, 억지를 부리는 고집스러운 사람들 상대하는 것도 좀 더 능숙해진 것이다.

이웃 간의 경미한 폭력 사건으로 만난 그 ‘어머님’은 나 같은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에고 우리 진짜 엄마는 어떠실지 모르겠다. 변호사랍시고 정신없이 일하며 길러진 사람 대하는 노련함과 인내심, 상냥함이 왜 그토록 가까운 혈연관계에서는 잘 발휘되지 않는지…. 사건으로 만난 ‘어머님’께 하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하면 우리 엄마 깜짝 놀랄 것 같은데 말이다.

낮 시간 엄마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딸 잘 지내냐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도 한참 후에나 답변을 하고 주말엔 친구들과의 모임에 밀려 부모님 찾아뵙는 건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엄마와 딸은 애증의 관계라고, 그동안 다투고 상처 주는 말도 참 많이 오갔다. 엄마는 왜 했던 말 자꾸 또 하냐며 잔소리 좀 고만 하라고 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우리 엄마는 약과였다. 이미 하신 말을 다섯번쯤 반복하시는 분에게도 난 미소를 잃지 않았었다.

많은 분들이 당신들 마음속에 있는 말 또 다시 한번 꺼내놓곤 하시는 건데 이전엔 정말 그 심정을 나는 헤아리지 못했다. 일하며 배운 게 업무 지식만은 아니었구나 싶다. 엄마 나이 서른 중반에 나는 열몇살이었던 거 같은데, 나는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들어가고 있다니. 세상에 나 같은 착한 딸이 어딨냐며 큰소리 쳤던 기억이 나 조금 부끄러워졌다.

5월이다. 내 생일이 있고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고 엄마 생신이 있는, 그런 5월을 30년 넘게 지내왔다. 비록 나는 이미 지난 주간 쥐도 새도 모르게 친구와 훌쩍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고 부모님께는 바쁜 변호사 코스프레를 하였으나 이제 다시 수첩을 들여다보고 부모님 뵈러 갈 일정을 표시해 봐야겠다. 이전에는 속도 없이 부모님 마음에 드는 선물을 사려 고심했으나 이번엔 실상 최고의 선물이라 하는 두툼한 봉투와 믿음직한 큰 딸의 활짝 웃음, 이런 저런 수다 떨 여유 있는 넉넉한 시간, 엄마가 해 주신 음식 마음껏 먹을 조금 비어있는 배를 준비해서 부릉부릉 바삐 출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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