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어린이날 연휴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우연한 기회에 제주올레길을 접한 후 올레길 예찬론자가 된 선배의 권유를 받고, 게으른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내가 길을 나섰다. 몇년 만에 일상을 탈출한 것인지. 많은 것이 낯설었다. 난생 처음 이용해본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맡기고 출발했다. 저질체력인 나를 배려한 선배가 난이도가 낮은 코스를 선정한 덕분에 예상 외로 힘들진 않았다. 야트막한 오름인가 하면 어느새 시원한 해변으로 이어지다 또다시 마을 골목길로 연결되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멋모르고 따라나서다 보니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 것인지 의아했는데, 찬찬히 주의를 기울여보니 참으로 재미난 방법으로 길안내표지가 곳곳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뭇가지 끝이나 가로등을 보면 파랑색과 주황색 리본 두 가닥이 매달려 말없이 손짓을 하고, 갈림길에 이르러 망설이고 있으면 키 작은 이정표가 진행 방향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슴처럼 생긴 키 작은 이정표의 이름을 찾아보니 ‘간세’라고 한다. 간세는 느릿느릿한 게으름뱅이라는 뜻의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따온 말로 조랑말의 형상이라고 한다.

길안내표지가 어느 정도 눈에 익고 보니 제주도 구석구석을 직접 걸으며 곳곳에 리본을 매었을 그 누군가의 손길이 얼마나 수고로웠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더불어 사무실 운영이나 대인관계로 머리가 복잡해서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예쁜 리본으로 안내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의 나래도 펼쳐보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게 된 것은 길을 잃었을 때였다. 올레길에 익숙해졌다는 자만으로 성큼성큼 걷다보면 길을 잘못 들어서 있었고, 갈림길에 이르러 잡다한 상념으로 한눈을 팔다보면 옆길로 새고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해법은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마지막에 리본을 본 지점까지 되돌아가는 것이다. 되돌아가서 놓친 리본이 없나 찬찬히 살펴보면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이틀 반동안 얼추 30km 정도는 걸은 것 같다. 그 과정에 길을 잃고 되돌아간 적이 부지기수이지만 심호흡을 하고 시야를 넓혀 살펴보면 파랑색과 주황색 두 가닥 리본은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짧은 휴가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 나 말고도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되는 분이 계신다.

성완종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홍준표 경남지사는 의문의 1억2000만원을 두고 “아내의 비자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자금이라.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비자금이란 ‘세금 추적을 할 수 없도록 특별히 관리하여 둔 돈을 통틀어 이르는 말. 무역과 계약 따위의 거래에서 관례적으로 생기는 리베이트와 커미션, 회계처리의 조작으로 생긴 부정한 돈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고 나온다.

그런데 도지사의 부인되시는 분께서 비자금을, 그것도 억대의 비자금을 조성하셨단다. 홍 지사는 부인이 모아둔 비자금이 3억원 상당이어서 아직도 1억5000만원이 남았고, 은행 대여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이 돈을 친척집으로 옮겨놓았다는 부연설명까지 했다. 1억원에 양심을 팔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고 강변하시다 아내의 비자금이라는 다소 황망한 카드까지 꺼내신 것 같다.

여기에서 멈추셨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 같은데, 홍 지사는 비자금 조성경위까지 내놓았다. “1995년 11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10여년간 변호사 활동을 했다. 그때 번 돈 일부를 집사람이 저 몰래 현금으로 10여년을 모았다. 2008년 여당 원내대표를 할 때 매달 국회대책비로 4000~5000만원을 받아 그 돈을 전부 현금화해 쓰고 남은 돈을 생활비로 주어 집사람이 비자금으로 모은 것이다.”

어이쿠. 이게 무슨 말이신지. 5만원권이 나온 것이 2009년 6월이었으니 1만원권 현금으로 1억이면 얼추 사과상자로 한 상자 가깝다. 3억원이면 은행 대여금고 수십개는 필요했겠다.

그리고 국회대책비를 전부 ‘현금화’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씀인지. 아무리 반드시 영수증처리를 해야 할 필요가 없는 돈이라 하더라도 굳이 ‘현금화’해서 쓰셔야 했는지. 더욱이 남은 돈을 부인에게 생활비로 주셨다니. 그 돈 우리가 낸 세금인 점 잊지 않으셨기를. 무엇보다 법률전문가로서 그 지식을 이용해 작은 범죄로 큰 범죄를 포장하려 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

홍 지사님. 지금이라도 길을 잃었다는 판단이 드시면 그 언저리에서 헤매지 마시고 과감히 뒤돌아서 왔던 길로 돌아가십시오. 겸허한 마음으로 살피면 진실이라는 리본이 나풀거리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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