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모름지기 ‘노인다움’, ‘어른다움’이라는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 ‘노인다움’, ‘어른다움’이란 나이에서 오는 관록과 위엄 이외에 그것을 덮고도 남는 지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노인은 지혜로워야 한다. 한편 젊은이가 지녀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솔직함’일 것이다. 그 ‘노인다움’과 ‘젊은이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다.

한해가 지나면 어김없이 한살 또 나이를 먹는다. 배달사고는 없다. 나이를 한살씩 더 먹을 때마다 초조감을 느낀다. 연령의식의 첨예화가 바로 그것. 자꾸 뒤를 돌아보며 내가 남긴 발자국을 찾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고 뒤에 남긴 발자국을 찾아내 내 것임을 알아보는 것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언제나 뒤를 보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자기가 걸어온 길 뿐이고 앞은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사람은 언제나 자신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변했다. 인생 50~60년의 시대에서 80~90년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렇게 세상이 달라졌다해도 생(生)과 사(死)의 문제에 노(老)와 병(病)의 고민이 더 두드러졌을 뿐 오히려 정신과 육체의 어긋남 바꾸어 말하면 정신의 열화(劣化)는 현저해졌다.

그 결과 ‘어른다움’과 ‘노인다움’을 점점 찾기 어렵게 되었다. 어른다운 분별과 관록, 노인다운 품격이 이 세상에서 차츰 사라져간다는 말. 나이라는 것을 숫자로만 파악하기에 바빠 거기에 숨어있는 세월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하기는 지금은 역사의 풍화의 시대이니까. 그래도 얼마 전만해도 우리 사회에 50대의 관록, 60대의 위엄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는가. 물론 7,80대는 그 나이가 갖는 문화재적 가치만 인정받았을 뿐이었으니까 논외.

그런데 이런 정신의 열화현상은 노인이라는 특정 연령층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 연령층 다시 말하면 젊은 세대에 있어서도 현저하다. 20대의 패기, 30대의 의젓함은 이제는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노인층과 젊은 세대 사이에는 사고와 의식 그리고 정서에 있어 흐름의 단절이 생겼다. 그 결과 노인은 젊은 세대에게 있어 오직 귀찮고 부담스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 소통의 대상은 아예 아니다. 노인은 ‘물에 젖은 낙엽’처럼 한번 달라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아서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라. 내일이 보이는가. 미래를 알 수 있는가. 젊은 세대가 보고 있는 내일, 알고 있는 미래는 진정한 내일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어제이고 과거인 것이다. 다만 어제와 내일을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혼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람은 과거의 지식과 경험으로 만들어진 레이더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사용하여 내일과 미래를 그저 짐작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짐작한 내일과 미래라는 것은 사실은 과거의 투영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내일과 미래는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 있어서나 불안하게 마련인 것이다.

불필요하게 과거에의 경도(傾倒)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일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제거할 수 있는 지혜를 찾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 지혜를 노인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말인가. 어른과 노인이 지녔던 관록과 위엄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면 된다. 그 관록과 위엄이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성(時間性)을 가지고 있는 지혜인 것이다. 거기에는 과거의 경험군(群)으로부터 추상화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단락적(短絡的)사고에 빠져 자신을 노인과의 비대칭(非對稱)의 상태에 놓고 자기라는 하나의 창으로 밖에 있는 세상을 보지 않는 결점이 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언제나 내일과 미래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적(詩的)행동자로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몸에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역동성이 지혜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을 뿐.

‘물에 젖은 낙엽’은 한번 붙으면 쉽게 떨어지지 않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언제나 조용히 있을 뿐이다. 요란을 떨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인의 침묵은 젊은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노인다운 배려일 뿐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생각이 지혜가 아니겠는가. 노인의 지혜라는 것이 어찌 장례식에서의 지시와 간섭에 그치겠는가. 그 지혜를 빌려 내일과 미래를 보다 소상하게 그려보는 것은 젊은 세대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솔직함이라는 덕목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젊은이다움’ 그리고 ‘노인다움’의 진정한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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