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내가 속한 충북지방변호사회에서는 한 아기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자체적인 모금운동이 있었다. 당시 생후 16개월 된 박지은(가명) 아기는 작년 6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희귀성 난치병으로 알려진 간질경변, 뇌경변, 심장판막증, 지적장애 등의 병명을 진단받았으나, 수술비가 없어 할 수 없이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중환자실에 입원하였지만 당장 시급한 심장수술은 엄두도 못낸 채 간신히 현 상태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사연을 지역신문을 통해서 알게 된 변호사회 임원들은 직접 병원을 찾아가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보호자인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아기의 사진을 찍은 뒤 그 사연을 회원들에게 전달하였고, 약 2주간의 모금활동을 통해 1000만원을 수술비로 후원하게 되었다.

지은이의 사연을 접하고 나에게 자주 떠올랐던 생각은 ‘만약 내 아이가 지은이처럼 아프다면 난 어땠을까?’라는 것이었다. 지은이가 앓고 있는 질병은 선천적인 것으로, 확률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이와 같은 병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 내 아내는 그러한 일반적 가능성 때문에 임신기간 중 산전검사를 받았고, 지은이와 내 아들의 차이점은 그러한 질병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아니냐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내 아들이 그 흔한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고 누런 콧물을 흘리며 가래 때문에 숨쉬기 곤란을 호소하였을 때마다 금방 어떻게 잘못 되는 것은 아닌지 가슴을 졸이며 하루빨리 낫기를 기도하면서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는 마음을 여러번 가졌었다. 하물며 지은이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병마와 싸워가며 지쳐 가고 있는 아기의 눈은 엄마와 아빠를 향하고 있는데, 정작 부모는 수술비가 없어서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 모든 부모는 책임감에 상응하는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지은이와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나로서는 그 어머니의 눈물을 그냥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동료 변호사들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을 농담반 진담반 자주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모금에 동참해준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지은이를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4월 16일은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왔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세월호 사건’을 나에게 다시 떠올려주었다. 그리고 외국의 한 자선단체가 팽목항 부근에 ‘세월호 기억의 숲’ 조성을 제안하면서 후원금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 자선단체의 이사장이 오드리 헵번의 맏아들이라는 사실보다도,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그 ‘외국인’이 1년이 지난 세월호 사건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유가족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변호사의 경우에는 어떨까? 변호사라는 직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능력이 필요하지만, 요즘 같이 자기중심주의가 극도로 팽배한 시대에는 ‘공감능력’ 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 않나 싶다. 공감한다는 것은 ‘타인의 주장이나 감정, 생각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낀다’는 것인데,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보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공부해서 남 주냐’식의 자기중심적 교육에 길들여져 있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의 패러다임에서 생존하길 강요받은 우리들(?)은 나보다 남을 이해하고 타인의 생각에 귀를 빌려 줄 마음의 여유가 없지 않았나. 게다가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공감하기 위해서는 때론 주장, 입증과 관련이 없는 내용까지도 경청해야 하는 시간낭비(?)와 인내심이 요구된다. 특히 소송구조나 국선변호 사건의 경우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의뢰인들은 자신들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길 바랬는데, 그들에게는 사건의 해결도 중요했지만 나에게 하소연을 하면서 그간의 심적 고통과 억울함을 토해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상담을 하다가 요건사실 또는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는 내용까지 듣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의뢰인들은 나에게 신뢰감을 보이며 격한 감정을 차츰 누그러뜨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 누구라도 그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더라면 알게 되었을 ‘뜻밖의 항변사유’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변호사가 ‘당사자화’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기록만 보고 정작 그 뒤에 있는 사람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가 왜 이 사건을 맡아서 하는지’에 관해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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