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밤톨 같은 초등학생 4명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장래 희망이 법조인인데 물어볼 것이 있다며, 아이들은 부지런히 오느라 가쁜 숨을 내쉬며 사무실로 들어와 앉았다. 진로 강의도 아니고 아이들이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 이런 곳에 선뜻 들어온 아이들이 신기하기도 했고, 그냥 오늘은 아이들의 이야기나 들어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요즈음의 나는 나에게도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이상했다. 집에 가서 몸을 뉘여도 매일이 칼 날 위에 있는 듯 극도로 두렵고 무서운 반면, 그와 반대로 일상적인 감정은 진공 상태처럼 비정상적으로 무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딤 속에서도 한 감정만큼은 기형적으로 거대해져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분노라는 감정이었다.

부담감에 근 한달간 일을 회피하고 그렇게 식물처럼 지내고 있었지만, 부끄러움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나는 세상이 싫었다.

그냥 모든 일에 분노가 솟구쳤다. 벚꽃은 여전히 희고 아름다웠지만, 세상은 너무도 흉측해 보였다. 왜 세상은 이 모양일까, 공정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세상은 가차 없고, 인정도 없었다.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땀으로 일군 대가는 거대한 조직 속으로 끝도 없이 빨려가 누군가의 욕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고, 정작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는 구걸과 적선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매일 같이 생활고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절박하게 사지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입이라도 뻥긋 하는 날에는 그 사람만이 퇴출을 당하거나 매장을 당했고, ‘알고 보니 질이 나쁜 사람이더라’ 또는 ‘누군가가 조종한 것이다’라는 이야기에 우리는 죄책감을 씻듯 무관심에 면죄부를 받았다. 그래서 자신의 절박한 외침을 들어주길 바랐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하고도 유일한 것인 생명을 내어 놓고 생을 마감했지만, 이는 아직 남은 삶이 많은 자들에 의해 오욕되고, 또 잊혀졌다.

언제인가는 우리는 수많은 생명들이 눈 앞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그렇게 가라앉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이었고, 가만히 있으라는 주문을 우리는 또 서로에게 되뇌이고 스스로 되뇌였다. 정말 그냥 모든 것이 싫었다. 내 자신 때문인지, 이런 세상 때문인지, 둘 다 때문인지, 그 어느 것 때문도 아닌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분노가 계속 올라왔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보내고 또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을 찾아온 아이들은 달랐다. 그들의 세상은 다른 듯 했다. 눈은 반짝였고,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아직도 정의나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이유인 것 같았다.

난감했다. 이렇게 다른 눈을 가진 사람들을 최근에 마주한 적이 있었을까. 어디까지, 무어라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소방수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예산이 없어서 장갑도 없는 채로 불량 보호복을 입고 불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까지 말해주어야 할까, 교수가 되려면 지도교수의 논문을 대필해 주는 일도 일어날 수 있고 집에 돈도 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말을 해주어야 할까, 법조인이 되고 싶다고 하지만 법이란 절대적인 정의도, 구원도 아니고, 법은 만민에게 평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말해 주어야 할까. 무엇이 그 직업을 사는 현실이고, 무엇이 또 이상적인 현실일까. 말을 하면서도 어떤 말을 더 해주어야 할지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내 답변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잠시 말이 오갔고, 아이들은 자신들을 기억해달라며 씩씩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하긴 내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알게 될 것이고, 이들은 곧 어른스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어른스러움이라는 것은, 불편한 현실들을 두루 경험하며 체념을 알게 되고, 무기력과 무정함을 느끼고, 적당한 부조리는 눈감아줄 줄 아는 관용과 너그러움을 체득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어른에는, 희망과 안간힘, 체념과 무기력감, 분노와 무감이 마구 뒤섞이고 반복되어 결국은 적당한 관심으로 자신을 소비하며 입만 살아 있는 알량한 어른도 있고, 돈의 무서움에 하루하루 위축되어 이득이 되는지 아닌지만을 따져가며 스스로를 보호할 수 밖에 없는 어른도 있으며, 더 큰 욕망과 지금의 자리를 위해 거짓을 진실로 주입시키거나 뻔뻔함을 기개와 의연함으로 삼고 있는 불쌍한 어른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에 그런 어른이 되어 버린 내가 있다. 고고한 척 하지만, 생각해보면 결국 분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나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힘든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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