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상은 온통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때와 장소가 따로 없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젊은 사람들만 하던 일인데 지금은 아니다. 나이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온 국민이 그저 손바닥만 들여다보며 산다. 이른바 스마트폰 얘기다.

스마트폰 속에는 정보가 많다. 또 재미가 대단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없다. 눈을 들어 높은 산을 바라보고 그 산 너머의 거친 바다 그리고 그 바다 건너 저 편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있는 하늘을 쳐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살을 비벼야만 배울 수 있는 ‘그 무엇’이 그 속에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손바닥만을 들여다 보아서는 당연히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걱정한다. 학문의 방법론 또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는 태도에는 ‘거시’와 ‘미시’의 입장이 있다. 물론 양자가 모두 유용하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시야의 협소가 나아가 의식의 결여를 불러오는 걱정스러운 결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야가 의식을 결정한다.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 나는 그것을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이 있어야 지혜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지혜라는 것 그리고 현명함이라는 것은 두뇌의 산물이 아닌 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이 없는 사람은 ‘눈으로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히려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데도 말이다. 이것이 자기규정이라는 함정이다. 세상의 모든 것의 가치를 자기규정에 의해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이 자기목적이 된다. 그 결과 욕구와 필요를 혼동하고 나아가 사건이 곧 역사이고 기술이 과학의 전부이고 경제가 문화를 대신한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고 만다.

결국 시야를 넓히는 일이 중요하다. 스마트폰적 시야가 아닌 적어도 ‘극장적 시야’ 즉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에 비해서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은 극장의 대형 스크린과도 같은 시야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시야라는 것도 시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한한 가능성의 꿈을 잊게 한다. 오히려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고 있는 이 개전전과도 같은 분위기는 우리에게서 이 시대의 꿈을 빼앗고 있을 뿐이다. 시대의 꿈을 상실한 우리는 일종의 농성심리를 겪고 있다. 농성하는 병사는 때로는 결전, 때로는 화전으로 아주 빈번히 그리고 아주 간단히 그 심리가 흔들리지 않겠는가. 큰 대야에 가득 담긴 물이 이리저리 출렁이듯이. 이 농성심리라는 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현실을 잊고 싶어 스마트폰이 주는 작은 재미, 그 위험한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불측이라는 요소에 대한 신앙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까.

변호사는 지금 시대와의 격투에서 패전위기에 몰려 꿈을 상실했다. 그 결과 변호사는 자폐관념(自閉觀念)이라는 감정의 계곡에 빠져있다.

생각해 보면, 변호사는 두개의 비대(肥大)감정을 가지고 있다. 변호사의 길을 먼저 걸은 사람들의 과거를 영화(榮華)라고 믿고 그것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고 매달리는 심리가 그 하나. 그리고 또 하나는 변호사 수의 증가로 인한 위상의 저하와 그로 인한 장래에의 공포심. 이 두개의 기이할 정도로 비대화된 감정 사이의 깊은 늪에 빠져있다. 그리고 그 늪의 앞과 뒤를 가로 막고 있는 두개의 비대감정의 절벽에 시야가 차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시야의 현실에의 고착화 즉 협착화의 증세가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피해자 의식에서 온 것이다. 변호사 수의 증가가 국가와 사회로부터의 냉대의 증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로부터의 냉대와 그로 인한 변호사의 장래에 대한 불투명성이라는 구도. 거기에서 오는 피해자 의식이 변호사로 하여금 앞에 말한 비대감정이라는 ‘감정의 기억’에 매달리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이 아닐까. 그 때문에 변호사는 가능성이라는 꿈을 빼앗아 간 ‘시대와의 격투’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역시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극장적 시야를. 그래야만 역사를 읽을 수 있고, 역사에서 ‘발상의 전환’ 그리고 ‘복안(複眼)의 시좌(視座)’라는 역사가 주는 교훈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이 교훈이라면 시대와의 격투에서 이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때는 변호사가 다시 세상과 시대를 향하여 존재 선언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대로 역사의 패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

다시 스마트폰 얘기를 해 보자. 거기에는 철학이 없다. 지혜를 낳는 의식의 모태는 바로 철학인데. 마치 사건이 곧 역사가 아니고 기술이 과학의 전부가 아니고 경제가 문화의 전부가 아니듯이. 정보가 철학을 대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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