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과 상담하고 기일에 참석하다 보니 낮에는 좀처럼 기록을 검토하고 서면을 작성하기 어렵다. 점점 늦어지는 퇴근에 파김치가 되어 사무실을 나서면 고개를 푹 꺾고 타박타박 골목길을 걸어가는 학생들과 마주친다. 상당수는 OO학원이나 OO독서실이라고 쓰인 버스를 타고 또 다른 일정을 소화하러 간다. 잠시 눈을 붙이고 간신히 일어난 출근길에서는 유아들을 가득 태운 어린이 보호차량을 본다.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쉴 틈이 없다.

대학에 입학해도 쉴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입학과 동시에 토익공부를 시작하고 어학연수도 다녀와야 한다. 학점관리, 공모전 참가는 물론이고 자격증도 여럿 필요하다. 비싼 등록금에 아르바이트는 기본이고 학자금 대출도 받는다. 봉사활동까지 스펙에 들어간다고 하니 대학의 여유와 낭만은 찾아볼 수 없다.

가까스로 졸업을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좁아진 취업문은 웬만큼 두드려서는 열리지 않는다. 정규직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계약직조차 구하기 어렵다. 취업 재수, 삼수에 몸과 마음은 피폐해진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三抛世代)를 넘어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는 오포세대(五抛世代)가 등장했다고 한다. 피로감은 희망을 좀먹는다.

일상의 피로감은 사회적 차원에서 가중된다. 작년만 되돌아 봐도 리조트강당 붕괴, 토막시체 유기, 총기난사, 건설현장 가스 누출, 환풍구 붕괴 등 어처구니 없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고위공무원들의 뇌물수수와 군대 내 성폭력도 여전했고, 기업의 도덕적 해이는 경품행사를 가장해 모은 고객정보를 보험회사에 팔아먹는 행위로 정점을 찍었다.

하나의 사고로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더 큰 일이 터졌고, 원인을 밝히고 대책을 세우기 전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앞서 발생한 사건이 정상적으로 수습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건으로 덮히는 것이 반복됐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피로감은 가중되었고, 사건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증발했다. 피로감이 망각의 기제로 작동되는 것이다.

서론이 이렇게 긴 것은 본론을 꺼내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입에 담기도 두려울 만큼 참혹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할 자신이 없어서이다. 맞다.

세월호에 관한 것이다. 세월호는 2014년4월 16일 아침에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있었다. 국가에서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 구조 중이라는 기사를 보았고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나왔다. 그러나 무사귀환은 바람에 그쳤다.

정부는 최선을 다해서 구조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렇지 못했고, 구조과정과 침몰경위에 대해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으나 이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많은 의혹이 제기됐고,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무사귀환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촛불집회는 정부의 무능과 거짓에 대한 규탄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구조의 골든타임만 놓친 것이 아니라 수습의 골든타임도 놓친 것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세월호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건의 실체를 밝히자는 당연한 요구가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고, 책임자를 가려내야 할 당연한 절차는 지지부진했다.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만드는 것에만 수개월이 걸렸다. 보상금 지급과 선체 인양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며, 결국 종북 타령까지 나왔다.

그 익숙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민이 느꼈을 피로감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피로감이 쌓이면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우는 것을 포기하게 되고, 세월호 사건은 잊혀지게 될 것이다. 국민의 피로감을 가중시켜 사건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정부가 가진 효과적인, 그리고 유일한 대책인 셈이다.

다시 완연한 봄이다. 길가에 핀 개나리가 눈부시다. 그 길 위에 아이들을 태운 노란색 버스가 지나다닌다. 열려진 창문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발랄하다. 영어와 수학에 쉴 틈 없이 내몰려도 아이들은 스스로 생명력을 내뿜는다. 그런 아이들이, 금요일엔 돌아오겠다고 떠난 수학 여행길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자본의 탐욕과 정부의 무능이 빚어낸 인재였다.

그 인재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는 리본이 노란색인 것은 생명과 희망을 위한 것이리라.

살아가는 일이, 그 과정이 아무리 피곤해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러시안룰렛의 탄창은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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