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경제학자에게 단 한가지의 경제지표를 주고 어떤 나라의 경제를 예측해 보라고 했을 때, 경제학자에게 필요한 지표는 무엇일까? 인구지표라고 한다. 한 나라의 인구추이를 보면 그 나라의 미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미래는 어떨까. 굳이 복잡한 인구통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삼포세대’라는 조어는 우리의 미래를 또렷이 비춘다. 연애와 결혼, 출산의 포기는 미래에 대한 가치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청년들이 ‘국제시장’ 세대와 ‘586’세대의 젊은 시절과 다른 선택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앞선 세대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앞선 세대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성취를 이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면된다’는 열정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오롯이 자신의 집을 마련할 수 있었고, 독재자라는 비교적 선악이 분명한 적과 ‘꽃병’을 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함께 설 수 있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동으로, 독일로 떠났고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를 행진했다. 따라서 미래를 위해 아낌없이 현재를 투자할 수 있었다. 현재의 절망이 미래의 희망을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세대의 젊음은 전세를 구하지 못해 등 떠밀려 빚을 내어 집을 사고, 정치적으로 선명하지 못한 민주화 이후의 시기를 살고 있다. 이 시대적 간극이 이해받지 못하기에, ‘열정페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다’니 하는 언설들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열정은 희망을 먹고 자라고, 흔들리는 청춘의 아픔도 미래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위함이거나,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힐링’이나 멘토들의 훈계는 의미가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결국 젊은 세대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종족번식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세대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대론은 경제적 자본과 정치적 스탠스의 대척점에 있는 기성세대와 청년들을 대비시키는데 유용했지만, 갈등을 증폭시킬 뿐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사회적 갈등의 양상을 세대라는 하나의 요소로 단순화 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세대론의 등장은, 유사 이래로 오래된 갈등 중 하나인 세대 갈등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나라에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욱이 직종을 불문하고 사회 전방위적으로 기성세대와 청년들의 경제적 간극이 크다는 점은 세대론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한다.

심지어 전문직이라 불리는 변호사나 의사들도 별반 다를바 없다. 전문직의 숫자가 늘어난 탓도 있겠으나, 고용변호사와 의사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청년들은 정당하게 받아야할 급여의 일부를 열정이나 청춘이라는 말로 대신 받는다. 얼마 전 한 요식업 경영인이 쓴 자기계발서 내용 가운데 ‘고용한 사람들에게 내가 일을 가르쳐주는데 사실 내가 돈을 주는게 아니라 받아야 한다’라는 부분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사실 도제식 고용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변호사업계에서 이와 같은 인식이 일정부분 저변에 깔려 있어 보인다. 더욱이 제도와 시대적 요청에 의해 늘어난 변호사 수가 법률시장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늘어난 변호사’들인 청년변호사들은 본인들의 책임인 것처럼, 쉽사리 업무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변호사는 ‘상인’이 아니므로, 나름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인권과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엄연한 변호사의 책무이다. 과거 선배들은 불의에 항거한 ‘지사형’ 변호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장 격무에 시달리며 박봉을 받는 청년변호사들이 품위유지를 하기에는 녹록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청년변호사들은 변호사로서 자부심과 직업인으로서의 현실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현상을 세대론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즉 ‘삼포세대’의 문제점을 세대 대결로 몰고 가서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는 오히려 갈등만 증폭시킬 뿐,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원론적이지만 서로의 문제점과 처한 상황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세대갈등의 간극을 좁히는 첫걸음이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기성세대의 열정이 담긴 영화를 보고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느냐고 질책하거나, 국가에 일자리를 요구하지 말고 중동으로 가라고 조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미래를 포기하는 젊음이 많을수록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청년 변호사들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눈을 들어 미래를 보기에는 당장 오늘이 버겁다. 젊은 변호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을 담보할 수 있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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