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자를 최종 인쇄판으로 ‘뉴스위크(Newsweek)’지가 작별을 고했다. 디지털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변화의 이행이지 고별인사를 나누는 게 아니라는 편집장의 변이 있었지만, ‘타임’지와 쌍벽을 이루는 시사주간지를 30년 가까이 정기구독해 온 나로선 애석함이 자못 컸었다.

그런데 그 해 8월에 실린 데이빗 듀코브니(David Duchovny)의 인터뷰 기사가 마치 그 주간지의 종언을 예고한 듯한 뉘앙스였기에 아직 기억에 선연하다. TV시리즈 ‘X-파일’의 이지적이고도 집요한 수사관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의 고등학생 시절 체험담이다. 당시 17세였던 그가 막 닫히려는 교내 엘리베이터에 급히 달려들어 타려다 팔이 끼여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때 문병을 온 라틴어 교사가 남겨준 말 한 마디가 그 후 평생에 걸쳐 삶의 방향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라틴어로 “Festina lente”였다. 즉 “천천히 서둘러라(Make haste slowly)”라는 뜻이다. 카이사르 암살 후 벌어진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 제정을 연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좌우명으로 유명해졌으며, 중세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모토이기도 했다. 현대음악의 거장인 에스토니아 출신 아르보 패르트(Arvo P둹t)의 현악과 하프를 위한 곡명으로도 또한 알려져 있다.

나로선 아직 아날로그적 인쇄물에 대한 전세계적 수요가 만만치 않으리라 여겨졌음에도 그토록 과감한 ‘뉴스위크’의 폐간이 너무 급히 서둘렀던 결정은 아니었는지 의아하기도 했던 참이다.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말은 논리적 형용의 모순이다. “서두르다 = 일을 빨리 끝내려고 바쁘게 움직이다”라는 사전적 풀이를 떠나, 뭐든 천천히 하다보면 서두를 수가 없고 서두르다 보면 천천히 할 수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내처 질주하거나 방향감각 없이 자신이 왜 서두르는지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욱 ‘빨리 빨리’병으로 이름 높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오로지 앞 만을 보고 내딛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볼 때 가장 큰 회오는 젊어서 빨리 빨리 달려오기만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순적 행업(行業)이 합해질 때 비로소 조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는 법. 서두르더라도 내가 무엇을 위해서 서둘러야 하는지, 또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야 할는지 알아채는 예지력과 결단은 조급한 서두름보다 더 중요하다. 긴박하게 서두르는 긴장감 속에서도 잠시 한 걸음 옆으로 비껴서 제3자적 시각에서 나를 살펴보는 것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실착(失錯)을 막아줄 수 있다. 일견 여유와 느긋함을 갖고 서두르는 속에서 한적한 치열함의 미학은 빛을 발한다. 천천히 걸어도 빨리 달려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이 한 세상 뿐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평균 수명이 반백년에도 못 미치던 조선조, 장년의 금싸라기 같은 18년간을 꼬박 유배지에서 보내었던 다산(茶山) 정약용. 그는 쇠잔한 낙망의 끄트머리에서, 젊어선 배움에 힘써 성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중년에 들어선 현자가 되기를 바랬겄만 다 늙어선 ‘어리석은 속인이라도 감수하겠다(老去甘愚下)’고 토로하였다.

우리 주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지난 날을 ‘아름다운 시절’이나 ‘골든 에이지’ 또는 ‘Good Old Days’라 하여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의 삶이란 원초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 할지니 지금 이 현재(present)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present)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태도일지 모르겠다.

사람이 죽기 직전 몇 초 사이에 자신이 지내온 생의 모든 순간들이 어느 한 장면도 빼놓지 않고 압축적으로 재현된다는 말이 있다. 그와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적 환영이 언젠가는 닥쳐오리라 믿는 나로서는 지금 이 순간의 인식과 체험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렇다면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시간의 흐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9세기 스위스 작가 켈러(Keller)가 설파하였듯이, “시간은 가지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 우리가 시간을 가로질러 가는 것(Die Zeit geht nicht, sie steht still, wir ziehen durch sie hin)”일까?

이제껏 평생을 시간에 뒤쫓겨온 법조인으로서 이제는 귀에 거슬림이 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만사를 포용해야 할 단계로 접어든 장년의 후반 도정을 걸어가게 되면서 다산의 뒤늦은 소회가 가슴에 와 닿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미혹에 휘둘리는 범인(凡人)으로서 일로부터건 인간관계로부터건 뒤쫓기며 초조해지는 경우에는 나 스스로 나직이 되뇌어본다.

훼스티나 렌~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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