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우연한 기회에 문화 재단의 자문변호사를 맡게 되었다. 게다가 후배가 미술전 기획일에 종사하게 되고, 주말마다 예술의 전당 지척에서 대학원까지 다니다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술전을 자주 관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초대권을 들고 갔다가 휘리릭 둘러보고 나오곤 했는데, 점차 횟수가 늘어나면서 한번은 오디오 가이드를 사서 듣기도 하고, 관람 후 관련 서적을 사서 읽게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차 미술전을 보는데 재미가 붙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은 그림을 보다보니 언젠가부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붓의 터치나 힘의 강약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가가 어떤 순서로 그림을 그렸을지 상상해보기도 하고, 터치의 강약을 따라 심장이 뛰는 기분도 들었다.

특히, 오르세 박물관에서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작품을 직접 보았던 날, 그 순간 느꼈던 아름다움과 황홀함은 잊혀지지 않는다. 온통 어두운 빛깔의 색만이 화면에 가득했지만, 검은 밤 하늘과 푸른 강변이 그렇게 화려해 보일 수가 없었다.

특히 그 안에 작게 그려진 남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흐릿한 윤곽만 그려진 탓에 정확히 인물을 분간해 낼 수는 없었지만, 난 고부라진 허리에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서로 부축해가며 걷고 있는, 그러면서도, 쉴새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노부부가 아닐까 마음대로 상상해보았다(나중에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흐는 실제는 술 취한 연인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아직 난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왠지 낯부끄럽다. 음악 감상, 영화 관람이라는 문화 생활에 비해 왠지 유난스러운 느낌이 들고, 또 그림이라는 것이 늘 새로웠기에 유난스럽다는 느낌만큼 낯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술관을 찾는 날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멍하게 앉아만 있다가 올 지라도, 그 시간은 방 한 구석에 앉아 티비를 볼 때와는 달랐다. 그래서 난 커피값을 아껴 미술관을 가는 쪽을 택했다.

얼마 전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난 나란히 손을 잡고 미술관을 찾은 노부부의 모습이나 젊은 남자 둘이서 그림 앞에 서서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 미술관으로 현장학습을 나와 그림 앞에 자연스럽게 앉아있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들을 보며, 무척이나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낯선 것이 타인에게 자연스러울 때, 일종의 부러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 나의 낯설음이 가져온 부러움이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미술관을 찾는 모습이 부럽고 점차 그림이 좋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미술관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그 안에서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며,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영감을 얻기도 한다. 예술가들의 천재성과 열정이 작품을 통해 전해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서 ‘영혼이 밥을 먹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나는 비싼 비용을 치르고 먹어야 하는 맛난 요리를 누군가는 저렴한 가격에 일상적으로 먹는다면, 그 모습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런데 어느 날인가 미술관 출구 근처 ‘예술은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찾은 것,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글을 보았다. 내가 그 글을 읽느라 머뭇거리자, 함께 했던 분은 내게 ‘예술을 가까이 하는 것은 우리의 비범함을 찾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평범함은 곧 무능력과 연결된다. 평범이라는 것 자체가 대부분이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늘 평범함을 벗어나라는 주문을 받는다. 나도 특별하고 싶고, 내가 비범하다는 점을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 그 비범함이라는 것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무기라고 생각하면, 누군가는 승자가, 누군가는 패자가 되어야 하지만, 각자가 발견한 존재의 의미라고 본다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된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내가 판을 짜고 스스로 의미를 찾는다면 나만의 비범한 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훌륭한 예술가 중에는 고흐처럼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세에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 경우도 많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며 일희일비하기보다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갔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비범함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즐거움은 편안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의 시선을 벗어나는 과정 혹은 스스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느낀 편안함. 물론 그림 좀 보고, 클래식 좀 듣는 식으로 예술을 가까이 한다고 해서, 평범한 일상이 꼭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비범함을 찾기 위한 창조적 활동은 계속 낯설기만 할 것이고, 내 존재의 의미는 타인의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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