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남3녀 중 셋째 딸이다.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참한 셋째 딸이 아니다. 얼굴을 보면 결코 데려가고 싶지 않은 셋째 딸이다. 그만큼 성격도 지랄맞다는 말이다.

4남매가 연년생이다 보니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또는 중학생에서 대학생까지 스펙트럼도 넓었다. 자연히 학비도 머릿수대로 4명분이 필요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는 수업료를 공납금이라고 불렀다. 기억하기로는 분기별로 몇 만원 수준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평범한 월급쟁이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셨다. 그러다보니 4남매가 공납금 고지서를 들고 오는 날에는 빠듯한 생활비를 두고 어머니 얼굴이 어두워지셨다. 하지만 내가 공납금을 제때 못 내서 교무실에 불려 다닌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이유를 철들고 나서 한참이나 지나 알게 되었다.

몇년 전 딸 셋에 어머니까지 간만에 한 자리에 모여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큰언니가 하는 말이 며칠 전 울산 시내 백화점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선뜻 인사가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큰언니를 비롯해서 공납금을 기일 내에 납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벽에 세워두고 창피를 주던 악명 높은 분이셨다 보니 강산이 두번이나 변한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그때의 상처가 생생히 떠오르면서 인사말이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리더라는 것이다.

동생들이 창피를 당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나이가 어린 순으로 우선순위를 적용하여 본인은 언제나 맨 마지막에 공납금을 받아갔다는 큰언니의 말에 한동안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경상남도가 4월부터 무상급식을 중단하고 그 예산을 서민자녀들의 교육지원에 쓰겠다고 한다. 무상급식비에서 중산층과 고위층 자녀들의 비용을 빼 저소득층과 서민자녀들에게 쓰겠다는 것인데, 수치를 들여다보니 이렇게 뺀 급식비가 643억원 정도. 이 돈으로 서민자녀 1명에게 연간 50만원씩 지원한단다. 매월 4만2000원 꼴이다.

나에게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방안은 한 마디로 부잣집 아이들한테서 빼앗은 밥으로 서민자녀들 참고서 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라도 서민자녀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해서 부유층자녀들과의 교육격차를 줄이시겠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학교는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고 공부하러 가는 곳이라는 홍 지사를 보고 있으면 법대 3학년 형법 시간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배가 고파 남의 빵을 훔친 절도범을 두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울 것 없이 공부해서 판사가 된 사람과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라면 하나로 주린 배를 채우며 죽어라 공부해서 판사가 된 사람 중 누가 더 엄한 판결을 내릴 것 같으냐”라는 질문이었다.

40대 중반이 넘어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고 보면 답이 명확하지만 20대 초반의 나는 꽤나 진지하게 고민했었더랬다. 가난한 사람의 심정은 가난한 사람이 알아준다지 않나. 배고파보지 못한 사람이 남의 배고픈 고통을 알까 등등.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그 반대다. 교수님께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당부하셨다. “나는 너보다 더 힘들었어도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고, 이렇게 보란 듯이 성공했다. 너는 뭘 했냐. 그러니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오만함에 매몰되지 말고 끝없이 역지사지의 마음과 열린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배워나가는 법조인이 되라는 말씀이셨다.

다시 경상남도 무상급식 논란으로 와보면, 앞으로 무상급식을 받고 참고서값 받으려면 가난을 증명하는 지원신청서를 제출하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첨부하라는 서류가 골때린다. 건강보험료 납부증명서, 지방세 세목별 과세증명서, 예금잔액증명서는 필수이고, 일용근로자의 경우라면 일용근로소득사실확인서, 월급명세서, 임대차계약서, 차량보험가입증서, 부채증명원 등을 내야 한단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앞으로 무상급식을 먹고 참고서값을 받고 싶으면 수십장의 서류로 스스로 가난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홍 지사에게 묻고 싶다. 과연 어린 학생들이 무상급식을 먹기 위해서는 “느그 아부지 머하시노! 머하시노 말이다!”라는 모욕적인 질문에 답해야 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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