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대 신임 대한변협 협회장 하창우 변호사

하창우 신임 협회장이 선거운동 기간동안 내세웠던 두 가지는 ‘준비된 변협회장’이라는 것과 ‘순수재야출신 변호사’라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겠지만 하 협회장은 삼수 끝에 신임 협회장에 당선됐다. 2011년 대의원 간선제에서는 신영무 전 협회장에게 패배했고, 2013년 첫 직선제에서는 김현 후보자와 단일화를 선언하고 출마를 포기했다. 2015년 4명의 후보들과 경합을 벌인 끝에 2위 후보와 600표 이상 차이를 벌리며 마침내 제48대 대한변협 협회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와신상담 끝에 오른 자리인 만큼 감회가 남다를 터, 당선 소감부터 물었다.

“사실 처음에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요. 서울회 총무이사, 대한변협 공보이사, 서울회 회장 등 근 10년간 회무를 접하면서, 내부개혁에 대한 생각은 물론,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인 전관예우, 검찰 권력의 부당한 독주, 만연한 심리불속행제 등 개혁이 시급한 과제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준비 기간이 길었던 만큼 회원들이 제 뜻을 알아주리라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떨어지고 보니, ‘아직 준비가 부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 회원들이 기회를 주신 만큼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사법개혁을 추진해보고자 합니다.”

아직 취임 한달이 지나지 않았건만 하 협회장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김영란법’이 통과되마자 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물론 이튿날에는 언론사 자격으로(대한변협신문 발행·편집인) 헌법소원까지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사시존치와 직역침해 저지를 위해 국회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변협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제가 지금 가장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은 연간 배출 변호사 수 감축, 사시존치, 합의 사건에 대한 변호사 필수주의 도입입니다. 모두 입법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일인 만큼 집중적으로 이를 다루기 위해 법제이사 직을 두 자리로 나누고 그 중 한명에게 입법활동을 전담시킨 상태입니다.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서도 언급했지만 제가 주장하는 적정변호사 수는 변시합격자 800명, 사법시험 200명으로 연간 1000명선입니다. 또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게 사법시험 존치가 로스쿨 폐지와 일맥상통 한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스쿨 제도는 4년제로 수정·보완하고, 사시는 사시대로 존치해 서민들도 법조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두자는 것이죠.”

이 밖에도 하 협회장이 취임시부터 강조한 게 전관예우 타파, 검사평가제 실시다. 재야 변호사로 30년 활동하면서 느낀 전관예우의 폐해와 법원·검찰의 권위의식이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변호사로 개업해서 제일 많이 느낀 것이 전관 경험이 없는 변호사에 대한 무시와 모멸이었습니다. 법원·검찰 출신 변호사들이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일반 변호사들도, 국민도 있다고 느낀다면 실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검사장 출신 변호사가 전화로 변론 한통 해주고 거액의 착수금을 받는 경우도 봤습니다. 법조비리의 진형적인 모습이죠. 저는 대한변호사협회 내에 전관예우 비리 신고센터를 만들어서 의뢰인이 변협에 신고하면, 이를 조사해 징계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형사고발대상인 경우 직접 고발까지 진행할 계획입니다.

변호사 등록도 강화해 재직 중 위법행위 등을 저질러 퇴임한 전관이 도피처 삼아 변호사로 등록하는 일이 없도록 등록심사를 철저히 할 것입니다. 길거리음란행위로 물의를 일으킨 전 제주지검장이나 1만여건에 달하는 막말댓글을 단 수원지법 전 부장판사 등도 얼마든지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변호사법에서 등록거부 사유로 정하고 있는 ‘위법행위’에 대한 해석의 폭을 넓히겠다는 것이지요.

검사평가제의 경우 서울회 회장 시절 도입했던 ‘법관평가제’를 기본 모델로 해서 적절히 변형·적용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법관평가·검사평가를 주장하니 혹자는 그럼 ‘변호사는 누가 평가하느냐’라는 말을 하던데, 나라의 녹을 받는 법관과 검사는 공정한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는 시장의 평가, 즉 의뢰인이 사건을 위임하는 과정에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겠지요. 다만, 변호사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받아들여 전국의 변호사를 손쉽게 검색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따로 구축할 계획입니다.”

이렇듯 24시간이 모자라 보이는 하창우 협회장도 숨을 고르기 위해 종종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문학, 바둑에 대한 조예도 깊다.
법률가도 딱딱한 법전만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하 협회장은 변호사 사회에서 클래식 매니아이자 재테크의 귀재로도 소문이 나있다. 비결을 물어보니 경제신문, 경제 관련 서적을 손에서 놓지 말라고 조언한다. 본인은 중요한 내용을 따로 정리해 노트에 기록해 두는데, 이제는 책을 내도 좋을 정도로 전문가의 경지에 올랐다고.

“대학 1학년 봄 축제에서 들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 작품 제43번은 클래식 음악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클래식을 하루도 듣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가 됐지요. 당시 테이프를 사는 것도 형편상 쉽지 않아 주로 FM 방송을 통해 음악을 들었습니다. 기쁨과 슬픔과 고독과 평온과 정열과 종교와 죽음 등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마력에 한동안 빠졌더랬습니다. 여러 악기의 단조로움과 복잡함과 기교와 조화에 더욱 매력을 느꼈습니다.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삼 교수의 ‘세계 명곡대사전’을 사서 10번 정도 탐독하다 보니 뭔가 귀가 확 트이는 느낌이 들더군요. 1974년에 발간된 그 책은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한시간씩은 꼭 운동을 하려고 하고 있고, 매주 일요일 아침에는 구두를 닦으며 한주간 있었던 일을 반성도 하고 중요한 사항도 정리합니다. 술은 아주 약간, 담배는 전혀 안 합니다.”

문득 그의 인생사가 궁금해졌다. 남해의 시골 소년이 어떻게 이런 자리까지 오게 됐을까.

“아버지는 농부셨는데, 가난했지만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근면성실함, 집중력, 교육열이 높으신 분이었습니다. 덕분에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시집간 이모네 집에서 하숙하며 명문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형제자매들도 다 잘 클 수 있었지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대검 차장검사까지 지내신 외삼촌(하 협회장의 외삼촌은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故 김일두 변호사다. 실제로 하 협회장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첫 5년을 외삼촌 사무실에서 고용변호사로 일했다)의 영향이 컸습니다.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그분의 모습에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하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생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호사가 되는 것도 쉽지 않더군요. 재수 끝에 서울대 법대 74학번으로 입학했는데, 사시 2차에서 계속 떨어지는 겁니다. 그 사이 대학 동기들은 하나 둘 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이 되는데, 저만 대학 졸업한 후에도 합격을 못하니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결국 제대하던 해(1983년) 5월에 2차에 합격했습니다. 법조인으로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들은 두루 다 겪어본 셈이지요. 그래서 더욱 청년변호사들의 현 상황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다 겪어본 사람으로서 조언하건대 절대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청년시절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그 이후에 닥칠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 같은 경우 변호사 생활 28년차인데도 서면 작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뭘 쓸까 고민하다 막상 써보면 별 것 아닌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경우 괜히 스트레스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또 일을 시작하기 싫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 시작해 보면 빨리 끝내려는 마음에 일이 잘 진척 될 때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느니 일단 뭐든 시작하는 게 도움이 되더군요. 머릿속에 있는 게으름을 지워버리고 마음을 고쳐먹고 과감하게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칠전팔기 도전정신으로 계속 부딪치다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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