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 가보면 국회의사당의 정문 출입문 기단 양쪽으로 멋들어진 소나무들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부러진 소나무가 아니다. 고풍스런 산수화에 나올법한 우뚝 솟은 금강송(金剛松)이다. 금강송은 다소 위압적으로 보이는 국회의사당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국회를 더욱 품격 있으면서도 친근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야에 자생하는 나무들 중에 우리의 정서와 잘 어울리는 나무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거나 그렇지 않을 때도 그 모습 그대로 잘 어울린다. 긴 세월 두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점도 아울러 큰 특징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 해온 나무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나무 중에서도 그 모양이니 품질이 으뜸인 금강송이 국회 앞에 심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좀 있었다.

현재의 국회의사당은 1975년에 준공되었다. 당시만 해도 국회의사당은 우리나라의 건축기술이 집약된 동양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모래섬이었던 여의도에 이런 큰 건물을 짓다보니 주변 분위기가 삭막했다. 그래서 매년 국회 경내에 조경사업을 실시하여 30년이 지난 2005년까지 여러 종류의 수목이 경내를 가득 채우게 되었고, 제법 그럴듯한 숲이 조성되었다. 나무들은 대부분 속성수로 메타세콰이아, 잣나무, 벚나무 등이었다.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는 향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그런데 국회의사당 앞의 향나무들이 외국산이었기 때문에 중국풍이니 일본풍이니 하는 말들이 많았다. 국회사무처는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2005년 그 향나무들을 우리나라의 대표수종인 소나무로 바꾸기로 했다. 이런 결정에는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남궁석 국회사무총장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문제는 소나무 중에서 어떤 종류로 하느냐 였다. 당시 적절한 수종선택을 위해 국회 조경건축자문위원회에 국내최고의 조경 및 수목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고 위원들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이 지금의 금강송이다. 금강송은 흔히 소나무의 제왕으로 불리는데 예로부터 궁궐의 대들보로 쓰였기 때문이다. 불탄 남대문을 복원할 때도 금강송이 쓰였다. 금강송은 강원도 고성군에서 기증을 받기로 했다.

금강송은 2007년 3월 말부터 5월까지 옮겨 심었는데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당시 필자는 국회사무처 기획조정실장으로 이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조경 전문가가 신신당부한 얘기가 있었다. “금강송을 고깃집 정원의 소나무처럼 만들지 말라.” 소나무를 정원수로 쓸 때 쉽게 운반하기 위해 맨 위만 남기고 가지를 모두 자르는 것이 관행이었다. 보통 운반비의 몇 배를 들여 온전한 금강송을 국회로 가져왔다. 심는 과정에서도 금강송은 최고의 수목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조심스럽게 식재되었다.

이런 지극정성 덕분인지 80그루의 금강송은 그 후 한 그루도 고사하지 않고 지금도 잘 크고 있다. 2010년 9월에는 태풍 곤파스가 와서 국회에서도 많은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는데도 금강송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국회의 금강송은 그 자체로 국회의 풍경을 바꾸었지만 상징적 의미도 크다. 소나무는 우리 국민이 가장 쉽게 접하는 나무일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조상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라며 애국가에도 등장한다. 소나무처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자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국회의사당의 전면에 우뚝 솟은 금강송은 우리 민주주의의 기상을 나타낸다. 아직은 연약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금강송처럼 더욱 강해지고 멋있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세계적으로 드물게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주주의의 요체인 국회를 바라보는 대다수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국회의사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행태가 국민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 간에 타협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국회 의사결정방법의 제도화 수준도 떨어지는 편이다. 소나무의 기상처럼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자라고 성숙해지는 방법을 모색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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