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아침은 딱 그렇다. 길에는 서늘한 기운이 성한데 바람은 청량하기 그지 없고, 햇살은 또 어찌나 따스한지 숨이라도 깊게 들이마시면 몸 속에 온통 봄기운이 돈다. 땅에서는 솔솔 흙내음이 올라오고,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는 지천에 꽃이 피어있을 것만 같다.

언제부터 왜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벚꽃이 좋다. 겨울은 단지 봄을 위해 체력과 식량을 비축하는 시기일 뿐,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벚꽃이 만개하는 봄을 상상한다. 벚꽃이 피는 곳만을 따라 그렇게 1년을 살아보는 것이 아직도 나에게는 꿈이다.

또 봄이 오고 있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던 중 복잡한 세상사, 별다른 것 없는 내 일상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봄이 오는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을 불러오는 하얀 꽃잎, 벚꽃 명소 소개다.

1. 부산의 달맞이길과 황령산, 그리고 부산 어느 곳의 어느 골목이나 - 부산과 하동은 비슷한 시기에 꽃이 피는 것 같은데, 그래도 봄을 맞자면 언제나 부산이 먼저 떠오른다. 달맞이고개를 오르는 길은 온통 벚꽃이다. 고개에 올라 아무 커피숍에나 자리해 앉으면 창 밖으로 탁 트인 바다와 햇살에 반짝이는 파도가 보이고, 그 아래 벚꽃이 만개한 거리가 있다. 잠시만 앉아 있어도 그냥 봄이다. 해가 넘어갈 때쯤이면 황령산을 오른다. 차로 정상까지 가는데, 올라가는 길의 벚꽃도 장관이지만, 산 정상에 서면 부산 시내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따스한 도시의 불빛들과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 길게 뻗은 벚꽃나무들이 부산의 묘한 정취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이 된다. 그리고, 연산동의 한양아파트 단지가 있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인데,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매년 봄이면 아파트 단지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단지 안에 벚꽃이 만발한다. 아파트 주민들도, 인근 주민들도, 모두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꽃구경을 한다. 붐비지 않는 일상 같은 여유로움은 덤이다. 사실, 부산 어느 곳의 어느 골목이든 봄이 아닌 곳이 없다.

2. 섬진강 강가와 하동 쌍계사 - 너무 많이 알려져 입구에 들어서는 것만도 몇 시간이 걸리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가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일을 마치고 출발하면 대부분 밤에야 도착하는데, 칠흙 같은 어둠 속에 순백색 꽃으로 덮힌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머리를 싸매고 일을 하던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답고, 서늘하다.

3. 진해와 경주 - 이 곳의 벚꽃이 다른 곳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옛 정취 때문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키가 낮은 집들 사이로 담벼락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그냥 하염없이 걷고만 싶어진다. 역시 최근에는 늘 한밤중에 도착했던지라 햇살에 비친 꽃잎들을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대신 뜻밖에 발견한 자전거로 촉촉한 꽃비가 내리는 골목을 달릴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봄이 오면 인적이 드문 한밤의 낯선 도시도 너무 좋아진다.

4. 인천의 SK에너지 공장 단지 - 인천하면 인천대공원의 벚꽃이 유명하지만, 내가 매년 가는 곳은 SK에너지 공장 단지다. 15년 전쯤 경인에너지 공장이었던 시절부터 다니게 된 곳인데, 왜 그곳에 그렇게 크고 많은 나무들이 심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벚꽃 나무가 심어져 있는 곳이라고 한다. 기름진 땅에서 자라서 그런지 유독 실하고 가지가 굵은 나무들이 가득하다. 평상시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매년 벚꽃이 피는 4월 중순경이면 회사에서 단지를 공개하고, 차와 간단한 간식도 제공한다. 4월이라면 누구나 한창 바쁠 시기겠지만, 잠시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이 곳은 꼭 한번 들러보기를 권하고 싶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벚꽃에 뒤덮인 너른 언덕에 나른한 봄이 있다.

그 외에도 벚꽃 명소는 많다. 서산 해미천의 벚꽃길, 청주 무심천의 벚꽃길, 제천 청풍호의 벚꽃길, 강릉 경포의 벚꽃길, 가깝게는 과천 서울랜드나 어린이대공원 등 3월 말부터 약 3주간의 사이에 전국 어디든 벚꽃은 지천에서 피고 진다.

사실 어디가 좋은지를 몰라서 가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올해도 피고, 작년에도 폈고, 내년에도 필 꽃.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딱히 여유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내 인생에 봄이 몇 번이나 더 오게 될까를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급해진다. 그래서 매년 버선발로 가장 남쪽까지 내려가 봄을 맞는다. 올해도 부지런히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 봄을 뽐뿌질한다. 한해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맞기 위해서다. 이 3주간의 봄, 꽃이 내 1년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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