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공기’에 의하여 지배되는 일이 많다. 사회 전체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 사회는 그런 경향이 매우 강한 것 같다. 공기에 약하다는 얘기다. ‘공기’라는 물건은, 어떤 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 일도 있지만 어떤 때는 온 세상을 휩쓸고 가버리는 ‘대세’라는 광풍이 되는 일도 있다.

공기는 ‘분위기’ 또는 ‘상황’이라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사회 분위기, 시대적 상황이 여기서 말하는 ‘공기’의 모태라는 말이다. 공기는 ‘민의(여론)’을 가장한다. 그리고 ‘정의’로 위장한다.

이 민의와 정의라는 것은 그 사회의 분위기, 시대적 상황과 만나면 곧 그 분위기를 고착화시키고 그 상황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상황적 필연성이다.

이렇게 고착화된 분위기, 절대화된 상황이 이른바 ‘대세’를 만들어 낸다. 이 ‘대세’라는 것은 한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실체’라는 포장을 뒤집어쓴다. 드디어 대세의 실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그 대세를 실체라고 믿는다. 그러면 그 대세가 사람과 사회를 지배한다. 그것이 바로 ‘공기의 지배’라는 것이다.

대세라는 것은 마치 사나운 말과 같다. 고삐가 없다. 아무도 그 말을 제어하지 못한다. 스스로 지쳐 기운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간혹 그 사나운 말에 운 좋게 올라타서 작은 영웅이 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이처럼 대세가 형성되면 그것은 세상을 제 것으로 만든다.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대세가 세상을 휩쓸 때에는 그 대세에 거역하려는 사람도, 이의를 말하려는 사람도 없다. 완벽한 지배다. 그러나 대세라는 사나운 말이 지쳐 힘이 빠지고 나면, 그것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폐허와 시체 그리고 허무만이 남기 마련이다.

여러 소리 할 것도 없다. 우리들 변호사가 그 대세라는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지금 서있지 않은가. 그 폐허 위에서 수많은 변호사의 시체를 보면서 허무감에 몸서리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서글프고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고, 역사다. 역시 ‘역사의 신은 사람의 시체로 만들어진 길 이외에는 걸으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역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 역사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머리 숙여야 한다.

생각해 보면, 변호사 사회를 휩쓸고 간 광풍은 남에 의한 변화, 변혁이었다. 우리 스스로가 변화하지 않은 탓에 남에 의하여 강제된 변화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정체성이 이 사회와 시대 속에서 안정성을 가지고 계속되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안심과 자만심에 취해 있었던 결과가 강제된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 그 정체성에 대한 안심과 자만심은 환경의 변화 즉 변화된 사회 분위기, 변화된 시대 상황과 직면했을 때 유연하게 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변화를 거부하는 경직성을 보였다. 결국 우리는 사회와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것이다.

변호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사회의 엘리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해 왔다고 자부한다. 한 마디로 성공적인 존재였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룬 성과에 사로 잡혀서 그 성과가 오히려 다음 단계로의 도약에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잊고 말았다. 개인도, 집단도, 국가도 다 마찬가지다. 그 성공으로 인해 우리는 자기 혁신을 주저했고 변화를 거부했던 것이다.

성공 가운데에는 많은 착오도, 결함도 있었지만 그것 모두가 성공이라는 이름에 덮혀 버리고 말았고 오히려 그 착오와 결함마저 성공의 한 요인이 되어 다음 단계에 그대로 답습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실패이다. 우리가 공기라는 대세의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한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과거를 잊고 자만심도 버려야 한다. 그러면 희망이 있다. 희망이라는 것이 별 것인가. 희망이 있다고 믿는 그 믿음, 그것이 희망 아닌가. 자만심을 버리면 희망이 보인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수(數)라는 세력이 있으니까. 중국의 소설가 노신(魯迅)은 그의 소설 ‘고향’에서 이렇게 말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지상의 길과 같은 것. 실은 지상에 본래 길은 없었으나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까지 우리를 짓눌러 왔던 그 무거운 ‘공기의 지배’를 벗어나 희망을 가져 볼 때가 되었다. 다만 우리에게 자만심이라는 껍질을 벗어버릴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그리고 언제나 숫자에 목을 매는 퇴영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한없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한번 지껄여 본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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