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협 제47대 협회장 위철환 변호사

나는 위철환 집행부에서 공보이사를 했다. 선거를 돕지 않았으니 무임승차나 마찬가지다. 로펌을 나와 개업을 한 후 서울회에서 변호사기자를 지원한 것을 계기로 첫 인터뷰를 하게 됐다. 첫경험은 강렬하기에 아직도 기억한다. 인너뷰 대상자는 국민대학교 장명봉 교수였다. 10년도 전의 일이다. 공보이사가 인터뷰를 할 필요는 없다. 기자 출신 편집장이 그만두면서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다시 시작해보니 제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실 마지막 인터뷰는 김창국 전협회장을 하고 싶었다. 그분이 내가 편집위원, 주간, 위원장을 한 서울회의 ‘시민과 변호사’를 만들었고, 바로 이 대한변협신문을 창간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리상 그 인터뷰는 나중을 기약하고 나에게 공보이사의 중책을 맡긴 위철환 협회장의 고별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위철환 협회장은 참으로 많은 인터뷰를 한 사람이다. 2년 전 협회장이 되면서부터 화제의 인물이었고, 2년 간 협회장 재임기간에도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마지막 퇴임 인터뷰는 전혀 새로운 인터뷰를 하겠다고 본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협회장 위철환이 아닌 이제 수원의 ‘보통변호사’로 복귀하는 자신의 선거 슬로건처럼 ‘보통변호사 위철환’을 만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쉽지 않았다. 그는 몇일간의 임기를 남겨두었음에도 마치 평생 협회장을 할 사람처럼 하루종일 회무만 생각하고, 회무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점 즉, 회무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지만 집요하게 내가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받아냈다.

경기중앙회 회장 4년(2년 임기인데 재선)을 하면서 대한변협 부협회장을 하였고, 직선제를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바로 협회장이 되어 2년을 보냈다. 몇일 후면 야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임기를 마치면 상실감이 크지 않겠는가?

솔직히 2월 23일 총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봐야 알겠다. 그 다음날 협회로 출근을 할 수 없는 것이고, 수원에 사무실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출근할 것은 아니다. 다시 일을 시작할 때까지 재충전을 하기 위해 쉴 때 어떤 느낌이 들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상실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두렵기도 하다. 그렇다고 지금 그때를 대비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 몇일을 남겨둔 상태에서 후임자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위에서 이제 그만 내려놓고 퇴임 후를 준비하라는데 솔직히 산적한 일이 많아 쉴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내 인생에서 보면 도리어 퇴임 후를 걱정하면서 남은 임기를 빈둥빈둥하는 것을 후회할 것 같다. 협회장은 권력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상실감이 생각보다 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웃으며) 도리어 속 시원할 것 같다.

일찍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제48대 협회장 후보 입후보 마지막날까지 떠나지 않았다. 정말 재선할 마음이 없었는가.

열심히 일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선배 협회장님들보다 젊어서 그런지 2년차에 들어갔을 때 주위에서 재선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솔직히 나도 욕심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집요하게 진정성을 가지고 재선을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조금 고민하다가 바로 상임이사회에서 불출마를 선언했고, 바로 언론에 발표되길래 솔직히 조금 놀랐다(웃음). 그 이후에는 마음을 접었다. 남자가 한번 한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시대가 변했고, 직선제 협회장에게 2년은 너무 짧고, 할 일도 많지만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재선에 도전할 경우 욕심으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고, 미리 불출마 선언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번복하고 입후보 한다면 당선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논란으로 회무가 한동안 혼란스럽고, 중단될 것이 명확했기에 불출마가 정답이었다.

재선요구와 관련해서는 두개의 사건이 생각난다. 하나는 일간지 사회부장들과 모처에서 모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내일 바로 보도할테니 출마선언을 하라고 추궁을 할 때이다. 언론사 사회부장들과 이런 저런 사회의 현안을 이야기하면서 그분들의 내공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계속 내 속마음을 떠보고 추궁하다가 나중에 불출마에 대한 나의 진정성을 믿어줄 때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다른 하나는 바로 입후보 마지막날 청년 변호사 몇명이 기탁금 5000만원까지 마련해, 203명의 출마를 권하는 연판장을 들고 하루 종일 재선출마를 종용할 때이다. 그들이 ‘그래도 위철환이 그들의 열망인 사시존치를 이루어낼 사람’이라고 믿어주는 것에 감격스러웠고, 이들의 마음을 받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조금은 흔들린 것이 사실이다. (웃으면서)며칠만 일찍 그런 강력한 추천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 친구들이 너무 늦게 찾아왔다.

새 협회장이 뽑힌 지금 생각하면 내가 불출마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창우 당선자가 그 청년변호사들의 마음과 다른 후보들을 지지한 마음까지 잘 소화하여 나보다 더 일을 잘하는 협회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본인은 중립을 표방했는데, 일각에서는 하창우 후보를 막후 후원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정말로 엄정 중립을 지켰는가.

우리 집행부에서 4명의 서울회 회장 후보가 나왔다. 그 사람들을 협회장이 나서서 단일화 시키라는 요구가 많았지만 거기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동일한 논리로 불출마를 선언한 협회장이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 후보를 지지하였다는 말이 나온 것은, 나에게 재선을 강력 권유한 배의철을 포함한 청년변호사들이 내가 출마를 포기하자 사시존치를 위하여 하창우 후보와 소순무 후보를 모두 만났고, 결국에는 하 후보 손을 들어주어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회와 협회 선거 모두에서 사시존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김한규 후보와 하창우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일각에서는 사시존치를 주장하는 사법시험출신 청년변호사들이 변호사들 사이의 대립각과 분열을 조장하였다고 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런 주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집행부 내에서도 그런 비난이 있다. 사시존치와 같은 작은 주제가 변협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되고 대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로 중견변호사들의 생각이다. 청년변호사들과 대화를 많이 한 내 입장에서는 그들의 진정성을 믿는 편이다. 청년변호사들의 대의가 꼭 사시존치만은 아니다. 그들은 세월호 사태가 발생하고, 변협에서 세월호 피해자들의 법률대리인을 자처했을 때 수백명의 청년변호사들이 자원을 하였고, 배의철 변호사의 경우에는 사무실과 가정을 팽개치고 팽목항에 내려가 180일을 피해자들과 함께 했다. 그때 그들이 믿는 대의는 ‘사시존치’가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일 것이다. 바로 그 동일한 친구들이 선거국면에서는 ‘사시존치’를 대의로 내걸고 그 대의를 확실히 실천할 후보를 찾아서 지지하는 것에 대하여 비난하기 전에 그들의 진정성을 믿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처럼 항상 변방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모든 대의가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자. 일제시대에 누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36년만에 독립할 줄 알았겠는가? 그때 독립을 주장하는 독립투사들은 솔직히 소수였을 것이다. 다수는 일본제국주의 체제가 계속될 줄 알았을 것이다. 사시존치도 그렇다. 청년변호사들이 로스쿨과 함께 사시도 존치시켜 달라는 것이지 로스쿨을 배격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50년후 사시가 존치되고, 로스쿨 제도가 일본처럼 쇠퇴할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나는 청년변호사들의 마음의 절박함과 진정성을 믿어주고 싶은 것이다. 다만, 내 귀에도 대립이 수준을 넘었다는 소리가 들린다. 하창우 협회장은 사법시험 출신과 로스쿨 출신 사이의 화합과 소통도 좀더 신경써 주었으면 좋겠다. 내부분열은 정말로 좋지않기 때문이다.

임기를 마치고 수원에 내려가서 본인이 주장하는 보통변호사로 살아갈 것인가.

내가 수원에 내려가지 않으면 무슨 대안이 있는가? 돈이 많아 유학을 가겠는가? 대형로펌에서 뽑아주겠는가? 협회장을 하면서 어떤 외부의 직에도 욕심을 내지 않았고, 수원 사무실 이외에는 갈 곳도 없다. 정말로 협회장 경력을 가진 보통변호사일 뿐이다. 수원은 나와 지연, 학연, 혈연의 연고는 없지만 고향 이상의 장소이다. 처음 개업하여 20년 이상 꿈을 수원에서 키웠다. 경기중앙회 회장에 도전하면서 2개의 공약을 내걸었다. 수원고등법원과 협회장 선거 직선제. 둘다 실현을 하였다. 금의환향을 하고 싶다. 수원에 있는 동료들도 과연 돌아오는지 궁금해 하던데 귀향잔치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통진당 해산으로 보궐선거가 이루어질 관악을에 협회장을 출마시켜 사시존치의 대의를 달성하려고 청년변호사들이 강력하게 출마를 권유한 것으로 안다. 이러한 관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도 직선제로 전국을 돌면서 선거를 치렀고, 전국 선거를 통해서 협회장이 된 사람이다. 선거는 조금 안다. 그렇지만 협회장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또 다른 세계이다. (웃으면서) 청년변호사들이 권한다고 내가 그곳에 출마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다. 그리고 내가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까지 마친 사람인데 가볍게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야당이나 여당에서 삼고초려를 하면서 공천을 해줄테니 출마하여 달라고 하면 고민은 해보겠다. 다만 내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를 위해서 나가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대의명분이 중요하지 않는가. 혹시 내가 관악을 보궐선거에 관심을 가진다면 내가 협회장을 하면서 입법발의시킨 사시존치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청년변호사들의 대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될 것이다. 사법시험과 같이 없는 사람들이 조금은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상징적으로라도 필요한 시대이고, 내가 그 상징적인 인물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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