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가난일 수도 있고, 자식이나 부모일 수도, 열등감일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랬다. 행복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단히 붙잡힌 발목에 ‘아직은 불행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며 견뎌야하는 순간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결국, 견디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 늘 꿈꾸기만 했던 일.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결심이 섰다. 떠난다고 해서, 나를 불행하게 하는 요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버틸 수 있는 에너지는 생기리라 확신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 하루에도 열두번씩 마음이 변했다. 이참에 우크라이나에서 늘 외롭다던 친구도 만나고 싶고, 캐나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고 있는 선배도 생각이 났다. 아니면 죽마고우가 있는 시카고로 가서 편히 쉬다 올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을 꾸리는 것도 문제였다. 어디를 가든 지금 살면서 쓰고 있는 것들이 전부 다 필요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는 항공사에 추가 수화물 신청하는 방법, 공간을 활용하여 배낭꾸리는 요령 등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갖가지 팁도 있었다. 아무래도 평소 사용하던 여행가방으로는 짐을 다 챙기지 못 할거 같았다. 캐리어를 24인치를 사야할까 28인치를 사야할까…. 가방 하나 고르는데도 며칠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처음 여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생각났다. 공지영의 ‘수도원기행’,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보며 그려보던 여행. 혼자 떠난다는 것은 온전히 혼자가 되어본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난 단 한번도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고,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해본 적이 없었으며, 낯선 환경을 혼자 극복해본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찌보면, 늘 누군가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내 모습 그대로였다. 아마, 여행을 결심하고도 실행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도, 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버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지난해 나를 힘들게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오르는 집값으로 인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빈번히 거처를 옮겨야 했던 것인데, 그렇게 이사를 할 때마다 난 살면서 그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한해 3번의 이사를 하다 보니 내 물건들 중에 절반은 살면서 손 한번 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없어져도 모를 것 같은 물건들이 상당수였다.

여행지마다 인증샷을 남길 마음은 없으니 카메라와 셀카봉 따위는 필요없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이니 패션을 뽐내기 위한 옷, 구두들도 필요 없었으며, 화장품도 그닥 필요치 않았다. 어디를 가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므로 괜히 울적하게 만들 물건들도 모두 버렸다. 그렇게 버리다보니 결국, 여름휴가를 떠날 때 꾸렸던 짐보다도 가벼운 차림새가 되었다.

그렇게 가방 하나로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거나 숙소에서 만난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러다 용기가 생기자 오래되고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모든 불이 같이 꺼지는 외곽지역에 숙소를 정했다. 해가 지면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다가 일찍 잠들 수 있는 곳이었다.

어차피 티비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 인터넷만 포기하면 진정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차차 적응하기 시작하자 나는 새벽 5시 경이면 저절로 잠에서 깼고, 마을 사람들과 눈(?)으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늘어난 시간 덕분에, 난 책을 읽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었다.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들을….

애벌레가 생존하는 이유는 나비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비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난 변호사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변호사다운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난 여행 중이다. 이 여행을 끝내고 돌아간다고 해서 삶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얼마간은, 섣불리 유행을 쫓으며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 같다. 버리면서 시작한 여행 덕분에, 영혼이 무거워질 수 있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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