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명의 피고인이 있다. 사건은 준강간. 술 마시고 쓰러져 있던 후배를 상대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사과를 받기 위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 하지만 상처 입은 피해자가 쉽게 용서할 리 없다.

성폭행 합의금이 보통 2000~3000만원 정도 형성돼 있는데, 앞자리 숫자가 하나씩 올라간다. 5000만원까지 올라도 응답이 없다. 합의 노력을 보여주기 위해 공탁을 걸고 싶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판결이 나왔다. 징역 4년의 중형. 판결문에는 “피해 변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양형이유가 불리한 정상으로 적혀 있었다.

중범죄 피고인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들을 만나보면 마지막에 한결같이 하는 말들이 있다. “형사공탁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는 얘기다. 공탁이란 받아야 하는 돈을 상대방이 어떤 이유에서 받지 않을 때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찾아갈 수 있게 맡겨두는 제도다. 주로 변제해야 할 금액을 맡겨두는 ‘변제공탁’이 대부분이다. 민법과 공탁법에 근거하고 있고 형사공탁제도는 이 형식을 차용해왔다.

|그런데 이 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니 무슨 말일까. 공탁법을 들여다보면 공탁을 맡기기 위해서는 필요한 서류들이 있다. 이 중 하나가 바로 피공탁자, 즉 피해자의 주민등록 등·초본이다. 동사무소에서는 원칙적으로 등·초본은 본인만이 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형사공탁이 유명무실해졌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 바로 이 지점에서다. 예전에는 인적사항이 적힌 공소장 앞면 사본과 피의자 진술조서 사본을 가져가면 피해자 초본을 떼줬다. 혹은 피해자 개인정보를 기입한 공탁서를 공탁소에 내면 접수 도장을 찍어주는데, 이 도장이 찍힌 공탁접수증을 가져가도 초본을 떼줬다. 피해자 개인정보는 담당 재판부에 얘기해 ‘공탁을 하고 싶다’고 하면 사건 당사자의 기록 열람·등사권에 근거해 대개는 알려줬던 분위기였다.

하지만 2007년 성폭행 피고인의 요청에 따라 기록을 열람·등사해준 법원 직원을 검찰이 소환통보 하는 등 대립각을 세우는 해프닝이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와 함께 개인정보를 이용한 보복 범죄가 언론에 회자되면서 점차 피해자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심각성이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후 검찰에선 공소장에 피해자 인적사항을 가렸고 재판부에서도 피해자 ‘동의’ 없이는 개인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제는 피해자 개인정보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어 공탁을 맡길 수 없고, 혹 안다고 해도 함부로 공탁을 맡겼다간 ‘불법적인 방법으로 개인정보를 취득해 동의없이 공탁했다’며 불리한 양형요소로 참작되고 있다. 피해자들의 개인정보 보호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서 재판과 관련한 보복 범죄를 엄중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국민 법 감정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방법은 많다. 한 예로 사건번호로 공탁을 맡겨두고 피해자의 신분 대조는 법원이 직접 해서 찾아가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판사들도 이같은 문제에 공감을 하고 있다. 전국 형사법관들이 모이면 꼭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주제도 바로 이 형사공탁제도다.

이쯤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피해자 허락 없이 쉽게 공탁을 허용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까. 대답은 쉽지 않다. 상처 입은 피해자를 두고 공탁을 쉽게 허용해 양형에 조금이라도 득을 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자는 건 폭력적이다. 하지만 엄벌을 통한 피고인의 처벌 만큼이나 피해자의 피해 회복도 중요하지 않을까. 피고인이 처벌로 교화됐다한들 피해자가 회복 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혹자는 민사 재판을 통해 손해를 배상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범죄자들 중에선 경제적으로 빈약한 이들이 많다. 즉, 1~2년 걸려 민사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승소 결과를 집행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공탁금을 찾아가는 게 곧 합의와 같이 재판상 화해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민사소송을 통해 추가로 배상을 받을 수 있다.

“보통 구속돼 있으면 온 가족이 나서 합의금 내지 공탁금을 마련하지만 유죄 판결이 확정되고 나서는 모든 걸 내려놓는다.” 형사 사건을 주로 맡아하는 변호사의 지적이다. 쉽지 않은 문제가 놓여 있고 숙의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범죄 피해-특히 성범죄-를 이유로 합의금을 받는 게 ‘꺼려지는’ 문화 속에서 책임이 있는 자가 자발적으로 나서도 피해 회복에 나설 수 없는 환경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다. '용서 받지 못한 자'에게도 피해회복에 나설 기회는 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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