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에 대하여,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제3세계의 지역적 조건에 맞는 기술. 제3세계로 직수입된 근대 과학기술이 그 나라의 근대화에 기여하기보다 인적 물적 환경을 파괴한 데 대한 반성에서, 새로이 자립 경제의 관점에서 모색된 기술 개념이다”라고, 위키백과사전은 “적정 기술이라는 단어는 개발도상국들, 아니면 이미 산업화된 국가들의 소외된 교외 지역들에 알맞은, 단순한 기술을 의미하는데, 보통 이 단어가 이용되는 기술들은 자본집약적 기술이라기보다는 대부분 노동집약적 기술이다. 실제로, 적정 기술은 특정한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가장 단순한 수준의 기술을 말한다”라고 적고 있다.

널리 알려진 성공적인 적정기술 개발 사례는 ‘큐드럼(Q drum)’이다. 힘들게 물 항아리를 이거나 들고 가는 부녀자나 어린 아이들을 위한, 자동차 타이어처럼 생긴 물통이다. 물을 가득 채운 큐드럼을 굴리거나 가운데에 끈을 묶어 끌고 다닌다. 물론 잘 정리된 평지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언덕 혹은 산길이라면 큐드럼을 사용하는 일도 그리 간단치는 않다. 어찌보면, 가격대비로는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물을 싣고 다니는 편이 나을 수도 있긴 하다.

법조계는, 디지털로의 완전 대체가 여전히 불가능한 인간(人間)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규칙에 대한 양자의 납득과 승복을 의미하는 이성(理性)의 영역이다. 고급 노동집약적 분야로서 정보통신기술의 변화에 상대적으로 둔감하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법조계에서의 최소한의 기술(technology)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말하자면, 법조계에서 필요한 적정기술은 무엇일까. 텍스트를 주로 다루는 송무(訟務) 영역에서 가장 최소한의 기술로는 스캐너(scanner)와 오씨알(OCR, Optical Character Recognition)을 들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속하는 전자소송 국가인 덕분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스캐너는 종이 위의 문서나 사진 등을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변환해주는 기기를 말한다. 디지털 파일을 종이의 형태로 출력해주는 프린터(printer)의 반대되는 역할을 하는 기기다. 아날로그의 출력물은 스캐너를 통하여, 그 정체성이 페이퍼(paper)에서 이미지 파일(png, tiff, pdf 등)로 변한다. 그리하여, 창고나 서가를 가득 메운 수천 수만 페이지(page)의 종이기록 더미들은 바이트(byte) 단위로 환산되어 컴퓨터에 저장 보관된다. 일선의 많은 변호사 사무실들이 소송기록을 스캔하여 공간 절감을 시도하고 있다.

오씨알은 ‘광학적 문자인식’을 말한다. 스캐너로 읽어들인 이미지 파일을 인식 처리하여 텍스트 데이터로 바꾼다. 즉, 간단히 말하자면, 피디에프(pdf)에서 다시 텍스트 파일(txt, doc, hwp 등)로 변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의 패턴을 분석하여 이미 수집 저장된 표준 문자 패턴과 매칭(matching)하는 방식으로 주로 알파벳 언어권에서 디지털 문자 인식이 발달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성된 파일은 다시 프린터를 통하여 출력될 수 있는데, 최근에는 해당 프로그램들의 한글인식도 성능이 꽤 높은 편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2015년부터 민사, 행정, 특허 사건들의 판결문이 인터넷에 공개된다고 한다. 2013년 1월 1일부터 확정되는 형사사건 판결문과 형사 합의부 사건의 증거 목록이 모두 공개된다는 기사는 이미 만 2년 전에 게재된 바 있다. 판결문 데이터베이스는 송사(訟事)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보물창고다. 나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들이 오래전에 이미 다루었던 테마라면, 다시 그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이를 승계하여 연구발전시키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래서 선행사건의 판결문들은 소중한 자료다. 지식(智識)은 공유되면서 지혜(智慧)로 변한다.

예컨대, 이미 시중에는 방정식문제가 적힌 종이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 미지수 엑스(x)의 값을 자동으로 계산하여 정답을 알려주는 ‘포토 매스(Photo Math)’라는 무료 어플리케이션이 있다. 책에 나온 수학문제를 사진을 찍으면, 광학인식을 하여 텍스트를 추출하여 문제를 인식한 후, 컴퓨터가 자동연산하여 그 정답을 현출하는 방식이다. 그 처리속도가 워낙 빠르니, 말하자면 ‘카메라 계산기’라 부를만하다. 자신들의 오씨알 기술을 과시하기 위한 제품이겠지만, 그 시사점은 매우 크다.

공개된 판결문 데이터가 집적 저장되어 이른바 빅데이터 분석을 거치게 된다면, ‘카메라 판결 주문’이 미래에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즉, 소송자료의 오씨알 판독, 판결문 데이터 베이스 매칭, 빅데이터 사건분석 등의 단계를 순식간에 거치게 된다면, 과장하여 이야기하자면, 형사사건의 변론요지서를 촬영한 사진만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확률 47%’라는 예측분석이 가능할 날이 멀지 않았다.

사실관계와 증거목록을 촬영한 사진으로 ‘금 1억원 이상, 부분 인용 확률 80%’라는 결론을 미리 염두에 둔 채 변호사가 사건 상담을 하고 소장을 작성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빅데이터의 파도(波濤)가 이제 법조계에 다가오고 있느냐고? 아니다. 이미 수중(水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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