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책 52권을 읽고, 책을 읽을 때마다 내 블로그에 독후감을 남기기로 결심한 것이 2006년 1월 1일이다. 그 후 9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그 약속은 꾸준히 지켜지고 있다.
2014년에 읽은 책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오늘 소개하고자 한다. 서은국 교수님이 쓴 ‘행복의 기원’이다. 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두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생존과 번식이다. 사람 역시 침팬지에서 진화한 동물이므로 다른 생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과 침팬지가 진화의 여정에서 갈라진 것은 대략 600만년 전이고, 인간(호모 사피엔스)이 농경생활을 하면서 문명인의 모습으로 살게 된 것은 6천년 전 정도다. 즉, 시간을 1년으로 압축한다면 인간이 문명생활을 한 시간은 365일 중 고작 2시간 정도다. 364일 22시간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사냥, 그리고 짝짓기에만 전념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1년 중 고작 2시간에 불과한 이 모습에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가 동물이 아닌 줄 안다. 600만년간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버릇들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역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이다. 인간은 생존 확률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고 행복은 이 청사진 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가 한 마리 있다. 개 주인은 그 개를 파도를 타는 서퍼로 만들고 싶다. 새우깡이 있으면 된다. 개가 물가로 오면 새우깡을 주고, 물에 발을 담그면 새우깡을 주고, 서핑 보드에 올라 가서 균형을 잡으면 새우깡을 준다. 개는 서핑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서핑을 하고 있다. 개의 유일한 관심사는 새우깡이었고, 이것을 먹기 위한 행동이 어느새 서핑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행복의 본질은 개에게 서핑을 하도록 만드는 새우깡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서핑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점이다.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과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쾌감과 불쾌감의 신호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기회를 포착하도록 응원한다. 뱀, 절벽, 사기꾼, 썩은 음식 등은 치명적인 위협들이다. 이때 우리의 뇌는 두려움이나 역겨움 같은 불쾌의 감정을 유발시켜 ‘위험하니 피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감정은 그 어떤 매체보다 즉각적이고 강력하며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위험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 비옥하지만 가보지 않은 낯선 땅, 매력적인 이성, 절벽에 붙어 있는 꿀이 가득한 벌집, 지금 당장 손에 쥐지 못한다고 바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이런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의욕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 노력에 상응하는 강력한 보상이 필요하다. 쾌감을 유발하는 정서들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 희열, 성취감, 뿌듯함, 자신감. 이런 치명적 매력을 가진 경험을 한번 맛보면 또다시 경험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행복감이고 행복감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이다. 행복을 따뜻한 샤워에 비유한다면 불행의 요인들을 줄이는 것은 찬물 꼭지를 잠그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으로 샤워물이 덜 차가워질 수는 있지만 더 따뜻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많은 삶의 조건(돈, 명예, 권력 등)이 샤워기의 찬물 꼭지와 같다. 삶을 덜 불행하게는 만들지만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한편, 쾌락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고, 그것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본래 값으로 되돌아가는 초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즉, 오늘 사냥하여 풍족하게 고기를 먹었다고 하더라도 그 쾌감은 그 다음날 다시 초기화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사냥을 하러 나가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이것이 적응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생물학적 이유다. 그리고 수십 년간의 연구에서 좋은 조건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훨씬 행복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대단한 조건을 갖게 되어도, 여기에 딸려 왔던 행복감은 생존을 위해 곧 초기화 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한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즉,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큰 기쁨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기쁨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은 성취하는 순간 기쁨이 있어도, 그 후 소소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결국 행복은 아이스크림과 비슷하다는 과학적 결론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은 입을 잠시 즐겁게 하지만 반드시 녹는다. 내 손안의 아이스크림만큼은 녹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행복해지기 위해 인생의 거창한 것들을 좇는 이유다. 하지만 행복공화국에는 냉장고라는 것이 없다. 남은 옵션은 하나다. 모든 것은 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주 여러 번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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