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삶은 예측불가능(카오스)의 영역에 있다. 커피를 즐기며 여유 있게 출근한 아침은 오후에 발생할 대형 발생 사건을 예측하지 못한다. 중요사건 재판이라 잔뜩 긴장해 출근한 아침 역시 느닷없는 기일 변경과 증인 불출석까지는 예측하지 못한다. 기자의 상태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사회의 수많은 돌발 상황들. 그 불규칙이 체화가 되면 어느덧 적당한 긴장과 체념이 몸에 익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직업의 특성상 습관적으로 현상의 이유와 팩트를 찾는다. 대형 사건사고의 주기와 패턴 정도만 예측 가능하다면, 조금 더 준비된 기사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내면에서 발동하기 때문이다. 뒤이어 예측 가능성을 통해 특종을 하고 싶다는 욕망 역시 뭉게뭉게 따라온다.

마크 뷰캐넌 네이처지 전 편집장은 이런 기자의 작은 기대와 욕망에 대해 “인간과 자연세계의 작은 사건 사고들이 계속 쌓여 임계점에 도달하면 커다란 재앙으로 이어지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비교적 간단한 답을 제시했다. 복합계 과학에 대한 그의 책 ‘우발과 패턴’을 보면, 전쟁과 산불 등은 사망자 수가 2배 늘어날 때마다 발생 수는 일정수치로 줄어드는데, 그 수학적 패턴을 ‘임계숫자’로 명명했다. 산불의 임계숫자는 2.48, 전쟁은 2.62라는 식으로, 이 숫자를 함수를 통해 따라가면 초대형 산불의 이전과 이후에는 일정 횟수의 소형 산불이 발생하고, 국지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일정 수치에 이르렀을 때 더 큰 전쟁이 벌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지난 8년의 법조 기자 생활을 돌이켜보면 뷰캐넌의 주장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정권과 사회를 뒤흔드는 대형 사건 직전에는 항상 법을 통한 초소형 국지전부터 중형 전쟁까지 빈번히 일어났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형사 변호사들의 이름을 이런 저런 사건 언저리에서 자주 보게 되고, 고위법관 출신의 노장 변호사들을 서초동 청사에서 자주 마주치는 시간들이 축적되면, 언제나 몇 달 뒤엔 신문의 1면을 한달 정도 장식하는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되돌아보건대, 당시 마주친 변호사들은 실제 대형사건과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구세력 척결’, ‘공안’ 등 미세한 키워드와 암시는 줬던 듯하다. 멀리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사건이 그러했고, 가까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도 법의 이름으로 수많은 국지전이 빈번히 발생한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뷰캐넌의 논리대로, 법조의 복합계 측면에선 이미 임계점이 다다랐다는 신호가 속출했지만, 정작 법조에 몸담은 사람들은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지점이다.

문제는 최근 법조의 여러 정황이 또 다시 대형 사건을 앞둔 임계 상황으로 흐르고 있다는 불길한 기분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가 아닌 일개 기자인 탓에 내 기분의 객관적 증거 혹은 현 한국 법조 사회의 정확한 임계숫자와 임계점까지 제시하긴 어렵다. 하지만 취재 현장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긴장감과 압박, 예를 들어 ‘모 전 대통령이 자신의 몸에 500g의 필로폰을 넣어 발생한 피해에 대해 소송을 하겠다’는 황당한 민원부터, 현 정권의 핵심 인사였던 법조인이 재판 과정에 ‘빽’을 써 피해를 봤다는 제보까지. 법조인과 사회의 경계에 서 있는 기자에게 최근 증가하고 있는 수많은 법의 국지전은 분명 예사롭지 않다.

뷰캐넌은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낸 복합계 사회에서의 임계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고 한다. 현 상황에서 미담 기사, 공익 소송 등 어떤 선한 의도로 임계 상태를 막으려 애를 써도 터질 대형사건은 터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 역으로, 고민과 행동은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눈 감고 어쩔 수 없지 않냐고 체념하기보다, 폭발 직전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조금이라도 먼저 고민해야 할 의무가 기자와 법조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매월 둘째 주에 기고될 이 글은 여기서 출발한다. 꽃샘의 바람 사이에서 변호사 시장의 수요공급 문제의 위험성에 대해 논할지도, 초록의 유려함을 등지고 권위적인 법원의 말뿐인 ‘소통’의 위험함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역시도 예측불가능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 이야기들이 비록 낭만적이지 않더라도, 위험의 신호들로 임계점을 예상해야 할 법조인의 상식 정도는 될 것으로 예상해 본다.

모래산이 무너지는 것은 그 역시 모래 한 알 때문이다. 그 모래알이 산에 떨어지기 전, 경계에서 바라본 법조계의 문제의식이 글을 읽을 법조인들의 행동하는 의지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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