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진영(陣營)논리’라는 말을 쓴다. 자신이 속한 진영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거나 그 입장에서만 논리를 펴는 이들을 비판할 때 쓰는 말이다. 논쟁에 직접 나선 이들만이 아니다. 대중 역시 대개 진영논리에 빠져 있다. 특히 정치적 어젠다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 그렇다. 대중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입장에 무조건적으로 선다. 거기에는 어떤 논리도 없다.

이런 진영논리가 압도하게 된 것은 우리 사회에 이념이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부터 그렇다. 보수주의와 보수를 혼동하고 진보주의와 진보를 뒤섞어 마구 써대는 것은 그래도 참고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식자(識者)들 사회에서도 자유주의를 보수주의와 혼동하고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와 현대 자유주의를 무차별적으로 쓰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너무 자주 벌어지다 보니 대중들이 이념적 혼란을 겪는 일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념이 대중화되지 못한 것은 민주주의의 성숙을 방해한다. 그런 결과 자신을 ‘보수’라고 내세우는 이들이 태연히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정책인 보편적 복지 정책을 여과 없이 수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독일 산별노조가 처음 주장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관철해야 한다는 ‘보수’ 정치인도 있다. 정치인이 이러니 대중의 이념적 혼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념적 혼란과 진영논리는 이른바 ‘좌파’도 극심하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두고 ‘진보세력’이 죽었다고 하는 말이나 새 ‘진보정당’ 건설이니 하는 말이 그것이다.

대중은 대개 ‘진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진보주의를 혼동한다. 게다가 종북(從北) 주사파 역시 진보주의의 스펙트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헌법재판소가 통진당을 두고 그 최종 목적이 ‘북한식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본 것은 그들이 우리가 용인할 수 없는 ‘이단(異端)’이라는 결정이다.

적어도 그들은 북한 독재체제를 추종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종북을 의심했을 때 북한 체제를 비판하기는커녕 ‘종미’가 더 문제 아니냐고 받아쳤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과학적 역사관은 ‘불평등’에 분노하는 저임금 노동자와 ‘무산계급(無産階級)’에겐 하나의 종교다.

그런데 그 사이비에 지나지 않은 김일성교(敎)의 교리인 주체사상은 ‘무산계급’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라 독재의 수단으로써 고안된 것이다. 사실 종북을 의심받는 의원들 말고도 많은 정치인이 ‘북한체제’에 대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북한이 ‘국가로서의 명예를 가진다’는 오해다. 예컨대 고통 받는 북한주민 문제를 제기하면 ‘내정간섭’이라고 하는 자들과 북한을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으로 이해하려는 자들이 하는 오해다.

또 하나는 북한 김일성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런 오해는 한때 서구 공산주의자들이 주체사상을 두고 ‘민족공산주의’라고 칭하면서 모택동주의(마오이즘)와 비슷한 시각에서 본 데서 비롯됐다.

사실 우리 좌파들은 아직도 사상전(思想戰)을 치르는 중이다. 종북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직면하면, 좌파들은 ‘사상의 자유’니 ‘저급한 색깔론’이니 하는 주장으로 피하려 든다. 모두 다 진영논리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주체사상이 하나의 사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종북논란을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하거나, 종북을 의심하여 무조건적인 사상검증으로 몰아가는 것은 물론 옳지 못하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사상이 아니다. 독재의 교리이자, 사교(邪敎)의 교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수용하는 것은 물론 이를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헌법을 부인하는 것이며 반인류적인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를 추종하는 것이 된다.

사실 대부분의 종북주의자는 김일성 일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에 빠져있을 뿐 어떤 좌파 이론도 알지 못한다. 이런 무지가 ‘이단’을 낳았다. 어느 종교나 그렇듯이 경전(經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이단이 출몰한다. 결국 그들이 ‘이단’이 된 것은 제대로 된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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