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생 시절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접하고 나서 그 말의 슬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지금 만나는 사람과는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니 얼마나 슬픕니까? 그 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떠올렸습니다. 그녀를 만나게 되어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니….

나는 만 29세 때 할머니의 죽음을 만났습니다.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셨던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얼마 전 ‘내가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마음이 힘들다’는 표현을 손자에게 하셨고, 나는 마음을 다하여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할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조용히 들었습니다. 안방에 모셔진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습니다. 가족들은 나를 위하여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정작 나의 슬픔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제 안에서 그때 고였던 눈물이 밖으로 나옵니다. 나는 지금에서야 회자정리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이후에도 상당히 많은 연말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연하장과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면서 송구영신의 의미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해가 저물면서 항상 새로운 시작에만 주목하였습니다. 나도 철없던 시절에는 연말연시를 단순한 휴가로 보내다가 철이 조금 들었을 때에는 신년계획을 세우고 각종 다이어리와 일기장을 샀습니다. 작심삼일이 되기 십상이었던 새해 결심리스트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얼마인가요?

나는 인간문명이 정해놓은 시간의 경계를 수십 번 넘었고 가상의 스타트 라인 앞에서도 수십 번을 새롭게 출발하였습니다. 마치 끝없이 동일한 하루를 계속 반복하여 시작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종착점에 도달하는 연습은 하지 않았습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노인으로 태어나서 아기로 늙어가는 사람이라는 설정입니다. 벤자민은 늙은 몸으로 태어나서 실제로는 20세도 안 된 나이에 60대의 어른으로 취급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나이든 사람이 실제로는 어린이라면 어떨까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청춘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나이가 들었어도 지혜롭지 못하거나 철이 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단순하게 나이 들어가는 삶에 대하여 저항하고 싶습니다. 철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에 맞서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새해에는 이제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토정비결과 사주팔자를 따져보면서 영험한 점쟁이를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무한 긍정의 힘을 믿기도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세월호에서 거의 마지막에 찍었던 동영상들을 보았습니다. 45도 이상 기울어져있는 선실에서 아이들은 구명복을 입고 동영상을 찍으면서 서로 웃고 있습니다. 모두들 이제 곧 구출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어떤 여학생이 뜻밖에도 “엄마 죄송해요. 죄송해요”라고 우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그 순간 세상이 던지는 거짓 메시지의 실체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마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기울어져가는 세월호의 선실에서도 근거 없는 낙관을 말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시작과 끝의 의미를 새롭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시작을 설정할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바람일지라도 그것은 허락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외쳐도 그 꿈에 아무런 능력이 없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 안에 생명의 소원이 뿌리내렸다면 그 씨앗을 가꿀 수 있는 능력도 주어질 것입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반복적인 교훈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알파와 오메가’에 대하여 안다면 오메가로 다가가는 베타와 감마를 모를 수 없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만을 반복하는 새해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면 우리에게는 이에 대처할 능력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의식이 소실되는 죽음을 경험하고 있듯이 묵은 해를 정리할 때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마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 고여 있는 고마움을 표현하고 미안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이 부족한 이 세상에서 나 자신만이라도 사랑을 밖으로 꺼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것이 마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각자의 사정이 다를지라도 그 끝을 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도 한해와 다음 해의 연속은 계속 이어질 것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연속되던 시간이 멈추어설 때 우리가 가상의 시점을 정하여 연말마다 삶을 마감하듯이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마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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