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언 50년. 사법대학원을 수료하고 군 법무관이 되었고 다시 판사로 변호사로 법률실무에 종사한지 그럭저럭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이 50년이 되었다는 얘기. 생각해 보면, 그 넓고 아득한 ‘세월의 바다’를 용케도 건넜다. 그것도 쪽배를 타고. 작은 물결에도 흔들리고 약한 바람에도 방향이 바뀌는 그런 작은 쪽배.

이제 그 쪽배에서 내려 뭍에 올라 지나온 세월을 그리고 그 거친 바다의 파도와 바람을 생각해 본다. 무사히 바다를 건너왔다는 안도감이 있다. 그러나 또 하나 가슴을 때리는 후회가 있다. 그것은 ‘세월의 바다’를 항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능력임을 몰랐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무식했다는 얘기다. 항해 지식이 부족했다. 그러니 나는 바람과 물결에 쉽게 흔들리는 쪽배일 수밖에 없었던 것. 도대체 법률 책 몇 줄밖에는 읽은 것이 없으니 무식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무식이라는 말은 지식의 부족, 결핍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의 경직성’이 더 문제였다. 유연한 사고를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생각이 꽉 막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나만의 논리’로 세상을 대하고 말았다. ‘남의 논리’에는 언제나 귀를 닫았던 것. ‘나만의 논리’에 내가 갇혀 버렸던 것이다. 자연히 변화를 거부했다. 따라서 세상과 나는 언제나 유리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내 논리에 따르지 않는 세상을 나무랐다. 그럴수록 세상은 더욱 멀어져갔다. 변화 즉 자기혁신을 통해서만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는데. 그것을 모른 무식쟁이이었던 것.

또 한 가지, 자신을 엘리트라고 믿는 턱도 없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한 마디로 있지도 않은 환상만을 좇고 있었던 것. 그 때문에 언제나 ‘우월한 자’가, ‘누리는 자’가 되고자 했다. ‘섬기는 자세’, ‘겸허한 자세’는 입으로만 읊었을 뿐이다.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게으른 사람임을 몰랐다.

한 사람의 인간은 하나의 시대밖에는 살 수 없다. 따라서 내 시대는 끝났다. 다시는 쪽배든 큰 배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도 배를 타고 파도와 바람에 시달리는 사람 그리고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무식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인다. 부디 나처럼 되지 말라고. 나처럼 무식한 사람은 절대로 되지 말라고. 무식해 지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 즉 자기 혁신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지 않은가? 변화가 일상화되어 있는 지금 이 사회에서는 속도와 새로움만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결과 이른바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졌고 그것이 다양화되어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현대병을 앓고 있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의식의 동요, 보편적 가치와 이념에 대한 회의가 그것이고 그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 대한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 무력감에서 오는 혼돈과 불안이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주체성, 정체성(어떤 사회학자가 말하는 ‘존재론적 안심’)에 안주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혼돈과 불안을 걷어내어 무력감에서 탈출하기 위하여는 오직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 이외는 달리 방도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환상에서 깨어나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그 길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무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버려야 한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여기에는 분별과 지혜가 필요하다. 또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여기에는 대담한 용기가 요구된다. 우리의 정체성(존재론적 안심)마저도 크게 흔들리고 있는 이 마당에는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다.

배가 바다를 항해하고 나면 배 밑에 많은 굴 껍질이 붙는다. 그로인해 배의 운항속도가 뚝 떨어진다. 항해가 끝나면 반드시 도크에 들어가 굴 껍질을 떼어내야 한다. 사람도 같다. 나이 들면 생각에, 마음에 세월의 때가 낀다. 고루하고 완고하게 된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인내심이 줄어든다. 그 세월의 때를 벗기고 싶었다. 그래서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렇게 해서 나잇값을 하려는 것. 지금도 항해중인 배를 향해 이런 말이라도 하면 그래도 나잇값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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