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A 최초 아시아 이사 최 정 환 변호사

누구에게나 꿈 또는 로망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나에게는 국제사회의 주역이 되는 것이 로망이었다. 그래서 법대에 왔으나 처음에는 사법고시준비반이 아닌 외무고시준비반을 기웃거렸고,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국제법을 택했다. 연수원을 졸업하고 법무관 시절 대형로펌에서 개념도 불명확한 국제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할 때 일찍 투항하여 로펌행을 택했다. 소원대로 로펌에서 4년 근무 후에 영국유학을 갔고, 국제기구에서 일해보고 싶어 런던의 IMO(국제해사기구)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지금 조그만 구멍가게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마치 천직인양 소시민적으로 살고 있다. 그렇지만 한번 로망은 영원한 로망이다. 김평우, 신영무 협회장 때 국제이사를 역임했고, 엔터테인먼트 변호사의 선두주자, 세계한인변호사회(IAKL) 사무총장직을 10년 넘게 하고 있는 최정환 변호사가 지난 10월 도쿄 IBA 총회에서 선출직 이사(임기 4년)로, 그것도 일본의 강력한 경쟁자를 제치고 선출되었을 때 바로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는 내 로망을 이루어가고 있는 선배였기 때문이다.

IBA 이사 선출을 축하한다. IBA 이사 선출이 지니는 의미를 먼저 듣고 싶다.

IBA는 1947년에 설립된 세계 최대 변호사단체로 206개국 변호사협회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당연히 대한변협도 회원이다. IBA를 운영함에 있어 최고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는 회장, 부회장 등 고위임원인 당연직 이사 11명과 전세계 206개 변호사협회를 대표하는 선출직 이사 2명으로 구성된다. 선출직 이사는 2년에 1명씩 전세계 변호사협회 중 투표권이 있는 140개 변호사협회 대표들이 모여서 직접·비밀선거로 선출한다.

이번에 동경 총회에서 선거가 있었는데 일본이 주최국이고, 이번 총회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일본 후보가 있어 당선이 유력했는데 내가 예상을 깨고 당선이 되었다. 주로 유럽계와 미국계가 잡고 있는 IBA의 이사회 멤버가 되어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고, 기대가 된다. 개인적인 영광이기도 하지만 마치 반기문 UN사무총장이 한국국력의 결과이듯이 내 경우 역시 대한변협의 위상제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총회에서 위철환 협회장과 임원들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언제부터 IBA에 관여했고, 이사 선거에 나갈 결심을 하였나?

직접적인 계기는 김평우 협회장때 국제이사를 하면서부터이다. 내가 세계한인변호사회 사무총장으로 있고, 김평우 변호사가 그곳 회장이 되면서 알게 되었는데 대한변협 협회장이 되면서 나를 국제이사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협회 국제이사로서 IBA에 관여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많은 IBA 관계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김평우 협회장은 국제업무에 있어서는 나에게 전권을 주어 좀 더 활개칠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사람을 좋아하지만 특히 외국사람들과 만나서 친해지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 약간의 달란트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김평우 협회장이 후임 신영무 협회장에게 다시 나를 국제이사로 추천하여 1년 더 일했고, 3년간 국제이사를 한 것이 이번 선출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름 그대로 밑거름이지 그때부터 ‘IBA 이사에 도전해야지’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서울회 회장에 나가서 떨어진 적도 있지만, 내가 권력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다. 열심히 하지만 IBA 이사를 오랜기간 꿈 꿀 바보는 아니다(웃음). 이번 총회를 앞두고 주위에서 권유가 많았다. “한번 도전해봐라.” 특히 IBA에서 나의 멘토 역할을 해주시는 페르난도 펠라에즈 IBA 전임 회장님이 적극 권유해 주셨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도전하였고, 결과가 좋았다. 투표권이 있는 전세계 변호사협회의 대표들에게 나에 대한 소개와 지지를 호소하는 이메일을 보내고, 세계 각국의 친한 분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내가 아시아변호사협회(LawAsia)의 부회장직에 있어서 아시아 각국의 변호사협회가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협회의 국제이사를 하는 동안 친분을 쌓아놓은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프랑스, 덴마크, 가나의 변호사협회 대표들이 적극적으로 유럽, 미국, 아프리카지역의 선거운동을 해주셨다. 페르난도 펠라에즈 IBA 전임 회장님도 남미지역의 대표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또 IBA 동경총회 기간 동안 롯폰기의 재즈클럽을 빌려서 IBA 친구들과 파티를 하였는데, 그 파티에 의외로 각국 변호사협회의 대표들이 많이 놀러와서 나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었다. 일본에게 좀 미안한데, 그분들이 총회의 개최국이었기 때문에 유리하다고 방심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웃으면서) 이 선거가 서울회 회장 선거보다 훨씬 쉬웠다.

IBA 선출직 이사가 된 김에 당연직 이사 등 좀 더 높은 자리로 갈 생각은 없는가?

 내가 시켜주면 열심히는 하지만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하지 못하다. 4년후나 나중에 기회가 주어지면 마다하지는 않을 것같다. 인생에서 기회는 언제나 “사람”이 가져다주더라.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이야기한다.
국제 법조단체에서 활동을 많이 하다보니, 이곳은 국내의 어떤 자리보다 훨씬 오랜기간 헌신을 요구하는 자리라는 것을 실감한다. IBA내에서 여러 가지 활동으로 10년, 20년 잔뼈가 굵어야 그중에서 사무총장이 되고, 부회장이 되고, 회장이 된다. 그 자리에 간다고 최소한의 비용, 경비와 약간의 보수는 제공되지만 한국의 높은 자리같은 이권은 없다. 의미를 느끼고, 헌신을 요구하는 자리이다.

 세계한인변호사회 사무총장을 10년 넘게 하고 있다. 떡도 밥도 안나오고, 생색도 안 나는 봉사직으로 알고 있는데 계기는 뭐고, 10년 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덕에 김평우 전 협회장을 만났고, 그 덕에 변협 국제이사도 하고, 지금 그 덕에 IBA이사도 되고, 박 이사 만나서 인터뷰까지 하고 있으니 덕을 본 것이 아닌가. 나중에 말하겠지만 인생의 많은 변곡점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 중심에는 나를 그길로 인도해준 ‘사람’이 있었다. 유학 전 김앤장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미국 변호사가 있었다. 나는 한번 친하면 정말 친하게 지낸다. 그 친구가 미국에서 NYU에서 LLM을 마쳤을 때 LA에 있는 자기 로펌인 모리슨 앤 포에스터를 소개해주었다. 그 로펌에서 일할 때 다시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에서도 근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국인 3세인 그랜트 김 변호사를 만났다. 그분이 정말 애국심이 많은 분이다. 한국인 3세인데 말이다. 그분 덕분에 세계한인변호사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뭣도 모르고 돕겠다고 했는데 그게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세계한인변호사회 모임을 추진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일을 맡겼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일이고, 의미있는 일이니까 내가 자발적으로 지금까지 열심히 하는 것이다. 이 인터뷰 기사를 본 젊은 법조인들은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회원가입해 주기를 바란다. 전세계의 한인 변호사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알게 될 것이고, 그대들도 동참해야 한다. 지금 한국은 변호사의 포화상태이다. 네이버의 김상헌 대표와 의기투합하여 네이버의 지식in 검색 중의 해외부분 법률자문을 세계한인변호사회가 맡아서 하고, 그 비용지원을 받아 사무국도 차리고, 월급주는 상근이사도 두고 이제 제대로 조직화되었다. 대한변협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세계한인변호사회에 관여하고, 지원했으면 좋겠다.

법무부와 대한변협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청년법조인 해외진출아카데미의 아이디어를 내고 물밑 지원을 한 것으로 안다. 청년들의 미래가 해외에 있는가?

청년변호사들이 힘들다고 하지만 아직도 기득권에 기대는 바가 있다. 기득권이 사라진지 오래인데 말이다. 착시현상이다. 한국은 지금 법률시장이 포화상태이다. 해외로 나가야 한다. 그것도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동남아, 중동, 남미, 아프리카로 나가야 한다. 물론 준비를 해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마련된 해외진출 아카데미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준비해서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 일을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나가서 5년만 일하면 태국이면 태국, 인도네시아면 인도네시아 전문가가 될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이제는 세계 각국으로 진출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한국변호사의 수요가 있다고 본다. 특정 국가의 전문가가 되고, 그 국가에 한국기업이 많이 진출하게 되면, 아마도 국내로펌에서 오히려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거다.

주위를 둘러봐라. 많은 외국변호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취직해 있다. 그들은 경력이 많은 변호사들이 아니다. 외국의 청년변호사들이다. 그들은 기회를 찾아 이곳에 왔다. 우리 청년변호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조금 먹을 것이 있다고 아웅다웅할 것이 아니라 마치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전세계로 동인도 회사를 만들어 해외진출하였던 것처럼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한국은 21세기의 네덜란드가 되어야 한다. 물론 정부와 변협, 로펌들이 청년변호사들의 해외진출을 적극 도와야 할 것이다. 내가 IBA 이사로 있는 4년간 선봉장이 되겠다.  

 

언론과 인터뷰한 기사를 보니,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라’ ‘부모님이 말리는 길을 가라’고 조언을 한다. 진심인가. 어디에서 이런 반항정신이 나온 것인가.

내가 반항적인 사람은 아니다(웃음). 다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에 대하여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것, 자유주의적이고, 약간의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원래 우리 집안은 의사집안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모두 서울대 의대를 나온 의사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40대에, 아버지는 30대에 일찍 돌아가셨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어린 나이에 죽음에 직면했고, 아버지가 부재하다보니 한편에서는 삶에 대한 자유스럽거나 냉소적인 태도가 생겼고, 한편에서는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한다. 그렇지만 열심히 하다가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가볍게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런 나의 삶의 태도에서 후배들에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라,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후배들에게 권하는 것처럼 본인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살았나.

의도한 것은 아닌데 나는 항상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서 있었다. 원래는 가업을 이어 의사가 되려고 했다. 좋아보였다. 그런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할머니가 의사되는 것을 반대하셔서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놀다 보니 시험합격이 늦어졌다. 다행이 성적은 좋았다. 검사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친한 친구들이 김앤장을 갔다. 나도 영입대상이었다. 고민하다가 검찰이 아닌 김앤장으로 갔다. 1년차 때 엔터테인먼트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을 모집하였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길래 지원을 하였다. 유학 다녀오니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커져서 한국에도 큰 회사들이 많이 생겼다. 김앤장에서는 이해충돌이 생겨 수임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앤장을 나와서 엔터테인먼트 전문펌을 차렸다. 항상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면 내 길을 개척했다기 보다는 나에게 다가온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의지적이거나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기회에는 충실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기회는 항상 ‘사람’과 함께 찾아왔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데 적당한 때에 필요한 사람이 내 옆에 있어 그 사람이 나를 그 새로운 길로 인도를 해줬다는 뜻이다. 그래서 항상 후배들에게 ‘사람’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주위의 사람에게 잘하라고 권한다. 여러분들도 이 말을 명심해라.

국제통인 변호사님은 로스쿨 제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솔직히 우리와는 잘 맞지 않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깊이 생각하여 본 적은 없다. 다만, 최근에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논쟁에 대해서는 우리 제도에 좋은 시사점이 될 것 같다. 네덜란드는 법과대학을 나와서 변호사시험을 보고 변호사가 되는 제도이다. 그런데 최근에 네덜란드 변호사단체 임원 한분이 새로운 주장을 내서 논쟁이 뜨겁다. 그분의 주장은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 꼭 법과대학을 나와야 하냐는 것이다. 변호사 시험만 통과하면 누구나 변호사가 되게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맞는 제도가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에 대하여 찬반논쟁이 뜨겁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로스쿨 제도는 법과대학을 나오는 것을 넘어 대학원으로 법학전문대학원을 나와 시험을 봐서 변호사를 시키고 있으니 현대첨단사회의 분위기에 역행하는 제도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김앤장에 있다가 조그만 로펌을 운영하다가 다시 광장이란 대형로펌으로 들어갔다. 이유가 궁금하다. 한국사회에서 작지만 강력한 포럼이 힘든 것인가.

아니다. 지금 특정분야에 특화하여 잘나가고 있는 부띠크 로펌이 적지 않다. 내가 다시 대형로펌으로 들어간 것은 개인적인 이유때문이다. 대한변협 국제이사를 한 이후에 IBA나 LAWASIA 등 외국 변호사단체 업무에 많이 관여하였는데 조그만 로펌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많이 내기가 어려웠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경우, K-Pop이나 한류드라마의 성장, 한국연예기획사의 성장을 생각해봐라. 더 전문적인 변호사들의 도움이 필요한 국제 업무들이 점점 늘어났다. 내 사무실을 키우는 방법과 대형로펌에 합류하는 방식이 있는데 나는 후자의 방식을 택한 것일 뿐이다. 다행히 지금 사무실은 내가 자유롭게 돈 안되지만 한국변호사 업계에 중요한 국제업무를 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원해준다. 그래서 광장에 들어간 것이지, 다른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덕담 좀 해달라.

변호사 선배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내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덕담이 될 것이다. 오래전에 친구들과 삼성카드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길을 따라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이탈리아 지성인들의 삶의 자세이다. 그들은 비르투오소(Virtuoso)와 아르테(Arte)를 실천하면서 살았다. 비르투오소는 영어로 virtue에 해당하는 단어로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사는 삶, 아르테는 예술과 문화로 대변되는 인생을 즐겁게 향유하는 삶이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중창단을 만들어 공연을 하고, 국립오페라단,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같은 단체를 후원하고, 예술인을 지원하는 것은 아르테를 지향하자는 것이고, IBA 이사의 역할이 주어졌을때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던지, 변호사 업무와 관련하여 김앤장에서 다시 두우를 만들고, 다시 필요에 의하여 광장에 들어가서 변호사로서 나름 최선을 다하는 것은 비르투오소를 실천하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나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허무주의나 냉소주위도 주었지만 유한한 인생을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태도도 주었다. 항상 자기 하기 나름인 것이다. 우리 선배들과 비교하여 후배 청년변호사들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대들은 다른 청년들과 비교하여 혜택을 받았고,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삶을 즐기고, 또한 자신의 주어진 능력과 상황을 최대화(Maximise)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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