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년 1월이면 제48대 변협 협회장을 뽑는다. 그 잠정 후보들이 내세우는 가장 관심 있는 공약은 ‘변호사 수 감소’와 ‘변호사 직역확대’인 것 같다. 그만큼 변호사만 하여 먹고 살기 힘든 시대가 도래하였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지면서 자연스럽게 부업으로 혹은 아예 변호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런데 그런 생계형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 즉, 자신의 숨은 본능이나 재능을 찾아 다른 직업에 도전하는 변호사들이 있다. 소설을 쓰는 변호사들이다. 내 기억으로 꼽을 수 있는 분들만 해도 윤상일, 엄상익, 강형구, 임판, 강정민 변호사가 있다. 법원에도 도진기, 정재민 판사가 있다. 법률사무소 사무장 출신 임재도씨도 있다. 앞으로 법조인 중에서 분명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글만 써서 먹고사는 변호사도 나올 것이다. 그런 소설쓰는 변호사들을 대표하여 현재 대한변협신문 인터넷판에 단편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유중원 변호사를 만났다.

이제 친구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고, 바둑을 두면서 소일을 할 나이이다. 그런데 왜 힘들게 소설을 쓰는가?

나는 지난 30여년 동안 한주에도 수십장의 글을 썼다. 소장이나 답변서, 준비서면, 가끔 형사 고소장, 법률의견서 등을 쓰는 그런 글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한결같이 너무나 직설적이고 명쾌하며, 한 치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는 논리 정연한 존재들이었다. 우리가 다루는 법은 아주 단순명쾌한 것이다. 유죄면 유죄이고 무죄면 무죄이지, 중간 영역은 있을 수 없다. 그 단순명쾌함에서 강력한 힘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이 그렇지 세상만사 어느 것 한 가지인들 그렇게 명쾌하고 논리적인 것이 있는가? 그 지겨운 흑백논리의 멍에를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를 찾아온 것이 소설이다.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으니 세상을 알 만큼 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 간명한 법조인의 글쓰기가 소설가의 글쓰기에 아이러니하게 도움이 되었다. 유능한 작가란 작가 자신이 내면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숙해야만 세상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상극하는 모순된 목소리와 세계관들이 생생하게 얽히고설키면서 좋은 소설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독자들 중에 유중원 변호사가 소설을 써?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소설가 유중원이 지금까지 어느정도 소설을 썼는지 소개해 달라.

지금까지 장편소설 ‘사하라’와 단편소설들을 모은 ‘이별’을 이미 몇 년 전에 발표 하였고, 그러나 이들 소설을 여전히 붙잡고 수정을 하고 있다. 금년에는 장편소설 ‘시인(가제)’과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묶은 ‘달빛 죽이기(가제)’를 발표할 예정으로 원고는 이미 정리가 된 상태이다. 그러나 출판 사정이 열악하여 어떻게 될지는 예측하기 곤란하다. 대한변협신문(인터넷판)이 기회를 주어 원고료 없이 신문에 단편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웃음).

법률가의 글쓰기와 비교하여 소설가의 글쓰기는 무엇이 다른가. 소설을 쓸 때의 기분은 어떤가. 그리고 자기만족을 위한 소설쓰기를 하는가, 아니면 소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는가.

우선 글과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교류하면서 서로 유쾌하게 소통할 수 있다. 나는 컴퓨터를 쓸 줄 모른다. 오직 손으로 고통스럽게 쓰면서 내 몸과 글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래야만 말들이 내 몸에서 흘러나온다. 이런 기분을 젊은 사람들이 이해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에 소설가로서는 한심할 정도로 무명작가일 뿐이다. 어떻게 하여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내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기쁘기는커녕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는 소설의 문학적 가치 또는 책으로서의 완성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대부분 상업적 수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여기에 대중의 변덕이 뇌화부동하는 것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과감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무명작가의 장점이다.

나는 단 몇 사람이라도 내 소설의 배경과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독자, 소설 속에서 독자 나름대로 분석과 해석을 하여 작가도 모르는 의미를 찾아내는 진지한 독자가 필요한 것이지, 내 책이 많이 팔리고, 대중스타처럼 추앙받는 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관심도 없다.

법률가로서 성공한 이후에 2모작으로 작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을 보인다. 작가관이 궁금하다. 작가란 누구이고, 무엇인가, 작가는 고독해야만 하는가.

나는 모든 작가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작가는 모두 패배주의자이고 센티멘탈리스트이고 니힐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자나 낙오자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글쓰기는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확실한 방법이며 스스로를 일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말은 폴 오스터(미국 소설가)가 한 말인데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가상의 세계를 구축해야한다. 그때 칸트가 말한 ‘미학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작품을 쓰게 되지 않을까, 서사 능력이 고갈되어 쓰다가 막히면 결국 미완으로 남을 것이 아닌가, 하고 항상 근심 걱정을 하고 있다. 작가라면 모름직이 그 정도의 고민과 고독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작가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 작가란 결국 자기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주의자,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작가는 허황된 소리에 불과한 ‘영감’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터키의 속담처럼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쓴 소설 또는 에세이가 마음에 드나. 독자들에게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의 소설이나 에세이의 첫 번째 독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지독하게 꼼꼼하고 냉철한 독자일 것이다. 고로 우선 첫 번째 독자인 나의 만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작가로서 진실을 추구한다. 그 진실이란 것이 인간 삶의 진실 혹은 죽음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글이 어렵다는 것은 첫 번째 그 책임이 필자에게 있다.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필자는 이해하고 썼을까? 필자는 남의 것을 베끼거나 또는 훔치면서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고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데 역량 부족으로 요령부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독자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독자 역시 성실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도 않았으면서, 읽다가 중간에서 그만 뒀으면서, 대충 읽고 나서 어렵다고 하면 그건 독자 탓일 것이다.

여기까지 듣다가 궁금해졌다. (웃으면서) 지금의 말은 나는 진실을 추구하여 죽을 힘을 다해 소설을 썼는데 지금 나의 소설을 어렵다고 하는 것은 독자들이 대충읽고 쉽게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인가.

(웃으면서) 돌려서 하고 싶은 말을 했는데 정확하게 이해해주니 고맙다. 그렇다.

소설 ‘사하라’와 에세이 ‘나는 무신론자’인가를 보면 신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종교관이 궁금하다.

플라톤이 말했다. ‘젊어서 무신론자가 늙어서도 무신론자인 경우는 하나도 없다.’ 나 역시 나이가 들자 유신론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일신은 믿지 않는다. 범신론자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조건은 신의 문제를 외면하고는 그걸 따질 수가 없다. 박 변호사도 나이가 조금 더 들면 내말을 실감할 것이다.

많은 법조인들이 행복할 줄, 만족할 줄 모른다. 행복관을 묻고 싶다. 변호사님은 언제 행복한가.

행복은 바로 순간일 뿐이다. 우리가 행복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그걸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바보짓이라고 본다. 나의 경우 행복은 열정적으로 몰입할 때이다. 모든 것들, 사람들, 사건들, 사물들, 관계 등을 잊어버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때와 글을 쓸 때 그리고 섹스를 할 때만 오로지 열정적으로 몰입을 한다. 답을 하라면 그때가 제일 행복하다.

원로 선배로서 젊은 변호사들에게 멘토로서 한마디 해 달라. 다이나믹한 삶을 살았다. 혹시 나중에라도 자서전을 쓸 계획은 있는가.

나는 원로라는 말을 싫어한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자칭 원로가 득세하고 있는가. 당연히 나는 원로 변호사가 아니다. 내가 무슨 경험과 공로가 많은 변호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고 언제나 혼자이다.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소위 원로들이 멘토 운운하는데 그들 스스로가 멘토가 될 자격이 있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남에게 충고와 조언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위선자인 경우가 많다. 자서전도 그렇다.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닌가. 모든 자서전에는 과장과 미화가 너무 심하다. 그리고 솔직하지도 않다. 우리나라 전기는 유명한 사람의 자손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 대필 작가에게 많은 돈을 주고 쓰게 한다. 그러니 제대로 쓸 수 있겠는가. 공자님이나 예수님인 것처럼, 인간적 결점이 단 하나도 없는 것처럼 쓰여지는 것이다. 그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우리 사회는 더욱 성숙해야할 것이다.

유중원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18기 출신이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나는 19기다. 1년 선배이고, 그가 동기 회장이다 보니 지금까지 그를 볼일이 참 많았다. 1년 선배가 원래 제일 친하고 또한 어려운 존재이다. 그와 앉아서 법률이야기(그와 나는 모두 해상보험 전문변호사였다)가 아닌 소설이야기, 인생이야기를 하니, 그의 진면목을 보는 기분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를 술과 사람 좋아하는 호방한 법률가로 이해하였는데 이제는 고독하고, 치열한 소설가로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그 동안 받은 소설책 모두 구석에 처박아 놓았는데 다시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