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재정’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등이 그 존립과 활동에 필요한 재력을 취득하고 관리하는 작용인바, 국민에 대한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만큼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도 크다. 그에 따라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의회가 재정에 대한 형성력, 통제권한 등을 좀 더 효율적으로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재정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제도적 요소로는 조세법률주의, 예산법률주의, 의회의 예산수정권한, 통합재정(국가재정활동의 모든 수입과 지출이 예산안에 포함되어야 함), 독립된 회계검사기관의 의회 보고 등이 꼽힌다. 재정에 관하여 의회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구체적 운영에 관하여 법률로써 규율하도록 함으로써 국가의 재원이 국민을 위해 쓰여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세법률주의는 채택하고 있으나 지출법률주의의 원칙, 행정부로부터 독립한 감사기관의 재정감사 등이 채택되어 있지 않으며, 의회의 예산수정권한에 대하여도 헌법 제57조에서 정부의 동의 없는 국회의 예산 증액 및 새 비목 설치를 금지하는 조항을 두어 제한을 가하고 있다. 재정이 더욱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설정되기 위해서는 제도로써 민주적 운영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는바, 우리나라에서 재정민주주의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어떤 입법적 개선이 필요한지 살펴본다.

2. 현행 제도의 문제점
(1) 예산법률주의 등 재정의 근거 조항 관련
현행 헌법은 조세 외 국민부담에 의한 재정수입에 관하여 근거조항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세입 규모가 커지고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부담금 등 조세 외 국민부담에 의한 재정수입도 법률에 근거하도록 명시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또한, 통합재정의 원칙상 총예산이 계상되어야 하고, 현재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합친 총 예산총계 규모보다 기금 규모가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금’에 관한 헌법 규정이 없는 것도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예산이 법률의 통제에 따라 예측 가능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예산법률주의의 도입도 필요한 과제이다. 현재 세입 분야에 대하여 조세법률주의가 채택되어 있음에 반하여, 지출분야에 대해서는 예산이 법률과 별개의 형식으로 규정되어 있음으로써 예산의 규범력 또는 구속력이 모호해지는 문제가 있다.

즉, 예산의 목적 외 사용 등 의회가 심의·확정한 예산에 위배하여 행정부가 지출작용을 하더라도 위법사항에는 이르지 못하게 되므로 효과적인 책임성 확보가 어려운 것이다. 예산이 법률의 형식이 아니고 우리나라처럼 금액이 나열된 통계표의 형태로 제정되면, 입법부는 예산항목과 예산금액만 결정할 뿐 예산지출의 목적, 방법, 권한, 한계 등을 규정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결산심사에 관한 내용도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단지 감사원 결산의 국회보고만 규정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국회의 결산심사가 실질화되기 위해서는 예산집행에 대한 일상적 회계검사가 선행되어야 하는바, 우리나라는 감사원이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어 결산승인이 사실상 감사원에 의하여 종결된 사안의 추인에 그치는 실정이다. 이에 관하여 감사원을 의회 소속으로 하거나, 최소한 행정부에서 독립한 기관으로 두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2) 의회의 예산수정권한 관련
전통적으로 의원내각제 국가는 권력의 융합을 특징으로 하므로, 다수당 의원들로 구성된 수상과 그 내각에 의하여 편성된 예산에 관한 법률안에 대하여 거의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예산의 증액이나 새 비목설치와 같은 적극적 수정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안이라는 개념을 의원내각제의 논리상 상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충실한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입법권이 의회의 전속적 권한 사항이며, 예산법률주의를 채택하고 있을 경우 의회의 재정에 관한 입법권한이 더욱 폭넓게 보장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의회의 적극적 수정 금지 조항을 두고 있어 체계부정합을 야기한다. 헌법 제57조는 ‘국회가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 조항은 제헌헌법 제정 당시 유진오 박사의 초안에 들어있던 것으로, 유진오 박사는 의원내각제 정부형태를 염두에 두고 영국의 예를 따라 이러한 조항을 제안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외국의 입법례에 비추어 보아도 우리나라와 같이 의회의 예산수정권한을 강하게 제약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독일의 경우 연방기본법 제113조에서 ‘연방정부가 제안한 예산안의 지출을 증액하거나 새로운 지출을 포함하는 법률은 연방정부의 동의를 요한다’고 하고 있으나, 그 구체적 의미가 의회의 수정 권한에 대한 제약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는 의문이 있다. 즉 그 조항은 단계별로, 지출 증액이나 새로운 지출 포함 법률을 의회가 ‘의결하기 전’에는 6주 이내에 법률 의결 연기를 요구하고, ‘의결 후’에는 4주 이내에 재의결을 요구하며, ‘이미 법률로써 성립한 후’에는 미리 의결 연기 요구나 재의결 요구를 한 경우에 한하여 6주 이내 동의를 거부할 수 있으되 6주 경과 후에는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규정되어 있는바, 이를 정부에게 적극적으로 동의 거부권한을 주었다고 해석하기 어렵고, 실제로 OECD에도 독일은 의회가 제한없이 예산법률안을 수정할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프랑스는 헌법과 함께, 법 단계상 헌법과 일반법률의 사이에 있는 재정‘조직법’에서 의회의 재정권한에 대한 내용을 구체화하고 있는바, 헌법 제40조에서 ‘공공재원의 감소를 초래하거나 공공부담의 신설 내지 증가를 수반하는 의원발의 법률안 및 개정안은 수리될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 재정조직법 제47조에서 ‘헌법 제40조에 의한 세출예산에 대한 수정법안은 항(mission)별로 한다’고 하여, 헌법이 정한 공공의 부담은 항에서만 적용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프랑스의 예산과목은 가장 상위의 항목인 항부터 프로그램, 액션 순으로 체계가 구분되는바, 결국 항의 하부구조인 프로그램에서는 의회에 의한 새로운 창설과 폐지, 예산승인액의 변경이 가능하게 되어 총액이 변경되지 않는 한 의회가 수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미국은 연방헌법에서 ‘지출은 법률에 따른 지출승인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의회가 통과시키지 않은 지출은 있을 수 없다는 대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종종 셧다운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결국 국가의 자금이 지출되기 위해서는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의한 수권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강력히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재정민주주의라는 근본 원리의 관점에서 의회의 재정권한은 보다 확실히 보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 재정준칙 관련
재정준칙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재정운용기준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재정준칙은 목표변수별로 총지출한도, 분야별 명목·실질지출한도, 명목·실질지출증가율을 설정하는 ‘지출준칙’, 매 회계연도 혹은 일정기간 동안 재정수지를 균형으로 하거나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재정수지준칙’,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일정 수준에서 유지 또는 단계적으로 감소하도록 하는 제약조건을 가하거나 국가채무의 한도를 정하는 ‘채무준칙’ 등으로 구분된다.

국가채무 및 재정지출의 확대와 함께 재정건전성 내지 재정균형화의 요청은 점차 커져가고 있는바, 재정준칙이 있게 되면 기준점이 법적으로 규율되는 면이 있어 재정건전화에 도움이 될 것이 기대된다.

3. 개선방안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 해소를 위해서는 큰 틀에서 재정에 관한 규범체계를 개편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재정민주주의라는 근본원리, 재정준칙 등 재정운용에 있어서의 원칙을 부각할 필요가 있으며, 세입 분야에서 조세법률주의 뿐만 아니라 기금, 부담금 등에 대한 헌법적 근거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의회의 예산심의 권한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예산수정권한을 제약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하고, 최소한 프랑스의 형태와 같이 총액 범위 내에서는 의회의 수정권한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산에 대하여도 헌법적 근거를 마련함과 더불어, 결산심사권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감사원을 행정부 소속에서 독립시켜 의회가 그 감사결과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바와 같은 문제의식 하에, 2008년 국회 헌법연구 자문위원회에서는 ① 헌법에 ‘재정’편 신설 ② 재정민주주의 명시 ③ 예산법률주의 도입 ④ 기금, 결산에 관한 헌법 근거 신설 ⑤ 강제징수 금전에 대한 법률유보 강화 ⑥ 국회의 증액 및 새 비목 설치제한 규정 폐지 또는 총액 범위 내 완화 ⑦ 국가채무부담의 한계규정 신설 ⑧ 감사원의 국회이관을 헌법개정방향으로 제시한 바 있다.

또한 최근 2014년 국회 헌법개정 자문위원회는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하고, 국회가 예산법률안 심의시 국가의 수입·지출 균형과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도록 하며, 감사원은 회계검사원과 감찰원으로 분리하여 행정부에서 독립한 별도의 독립기관으로 규정하는 구체적인 헌법개정 조문안을 제시하였다.

4. 맺는 말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민주적 정당성에 걸맞게 의회는 그 기능의 합리화, 실질화를 규범적으로도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대통령제를 취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의회의 정부에 대한 견제기능의 합리화, 실질화가 더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의회 본연의 역할인 입법권과 함께 예산, 결산을 중심으로 한 재정 영역에서의 의회의 역할은 국민 생활에 직접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바, 의회의 재정권한에 관한 규범 체계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며 재정건전성을 효율적으로 도모할 수 있도록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나라도 구체적으로 헌법을 비롯한 재정법 체계의 틀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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