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는 누구나 기억한다. 그런데 초대 대한변협 협회장 최병석 변호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만일 6·25 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가 아닌 김용무 변호사가 제1대 협회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정은 이렇다.

해방이 되고 한참 후인 1950년 6월 17일 각 지방변호사회가 대한변호사협회를 만들기 위해 대법원 회의실에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한변호사협회규약’을 통과시키고, 협회장에 김용무 변호사를 선임했다. 김용무 변호사는 미군정 당시 대법원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군정 당시 대법원장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미군정이 1945년 10월 11일 그를 대법원장에 임명했는데, 임명된지 4달 만에 판검사 40여명에 의해 불신임안이 제출되는 불명예를 겪었다. 그 후 미군정은 1946년 미군 사법부장 우돌, 조선인 사법부장 김병로 체재를 가동했고, 그 당시 최병석은 행형과장(형무과장)을 역임했다. 이날 이렇게 대한변협 창립총회를 마치고 법무부에 인가신청을 냈다. 그런데 며칠 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용무 제1대 협회장 후보자를 포함한 51명의 변호사들이 납북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이승만 대통령 정부가 국민을 기망하고 인도교를 폭파하고 자신들만 도망가는 바람에 일반국민뿐만 아니라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많은 법조인들이 희생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법조인은 발빠른 직업은 아니다.

전쟁 중에도 대한변협의 창립절차는 멈출 수 없었다. 부산에 지방변호사회 회장들이 다시 모여 1952년 7월 28일 부산지방법원 회의실에서 속개형식으로 총회를 개최하여 신임회장으로 그 당시 서울회 회장인 최병석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 창립총회결과는 법무부장관에게 보고되고 법무 제207호로 대한변호사협회가 인가됐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협회 창립은 2년 앞당겨졌을 것이고, 제1대 협회장도 바뀌었을 것이다. 전쟁이 협회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 정리 박형연 공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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