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메이지 유신기의 일본은 조선에 수교를 요청하지만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던 조선은 이를 거절한다. 서양 오랑캐에게 나라를 열어 준 일본 또한 이들 오랑캐와 다를 바 없다는 논리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된다. 일본을 모욕한 조선을 정벌하고 대륙의 교두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히데요시의 가신들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 패권다툼이 벌어진다. 결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리였고 이후 200여년간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게 된다.

히데요시의 가신들은 권토중래를 노리며 각자의 영지에서 와신상담하다가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에도 막부를 몰아내고 다시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히데요시가 그랬던 것처럼 대륙정벌을 꿈꾸는데 이를 위해 대륙으로의 통로가 되는 조선을 확보해야 했던 것이다. 조선은 결국 1910년 일본에 합병되고 만다.

정한론의 대두와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치욕의 역사이다. 정한론의 첫 번째 희생물은 바로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에 의하여 일본 영토로 불법 편입된 독도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9일 인천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하며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러시아 발틱함대를 무찌르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일본은 태평양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동북아시아에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1902년 영일동맹, 1904년 가쓰라-태프트밀약, 1905년 포츠머스조약에 의해 영국, 미국, 러시아로부터 각 조선합병을 묵인받은 일본의 마지막 걸림돌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1907년 8월 19일 용정촌(龍井村)에 설립된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 때문에 신경이 곤두 서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게 되면 한중간 영토분쟁지역인 간도를 영영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중국은 일본의 조선병합을 내심 반대하고 있었다.

중국의 견제로 조선합병이 지연되자 다급해진 일본은 조선합병의 걸림돌이 되는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해 버린다. 1909년 9월 4일 체결된 간도협약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다. 이처럼 간도는 일본 식민지화 과정의 두 번째 희생물이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태평양해전의 전략적 거점이 되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패퇴시켰고, 간도를 중국 영토로 줘 버리고 조선병합을 묵인받았다. 일본의 정한론은 독도, 간도, 한반도 순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간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일본이 간도를 정말 중국에 내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을 교두보 삼아 중국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고 실제 그렇게 했다. 중국은 간도협약에 의하여 간도를 얻었지만 순망치한의 화를 당하고 만다. 눈앞의 욕심에 급급해 화를 자초하고 만 것이다.

일본 또한 간도가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간도는 작은 조선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망국의 한을 품고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으려는 애국열사들이 간도로 간도로 모여든 것이다. 간도는 일제 식민지 시절 한민족이 비빌 수 있는 언덕이었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선구자의 일송정, 윤동주의 서시는 간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본에게 간도는 눈에 가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일본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간도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말살하려고 노력하였고 1931년 만주국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힘을 합쳐 일본에 맞서 싸웠다. 한민족은 한일합병 이후 간도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벌여나갔고 결국 해방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간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비극을 거치며 남북이 분단되고 간도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정한론의 두 번째 희생물이자 식민지 시절 작은 조선이었던 간도를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지 않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을 계기로 통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통일의 기운이 생성되자 1975년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통일 이후 대두될 간도문제에 대비하기 위한 국책사업의 일환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간도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통일을 위해 중국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에서 간도문제로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있느냐는 우려가 있다. 또한 최대 교역상대국인 중국의 경제적 보복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한국이나 중국 모두 명분을 중시하는 나라이다. 1887년 ‘내 머리를 잘라내는 한이 있어도 조선의 땅은 한 치도 잘라낼 수 없다’고 부르짖었던 토문감계사 이중하 선생의 목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다. 간도에 관심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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