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비디오 게임을 좋아한다. TV에 게임기를 연결해서 광매체를 넣어 게임을 한다. 그런데 요새는 영화, 게임, 소설 등 웬만한 디지털 콘텐츠는 죄다 파일화되어서 유통되다보니 비디오 게임도 그 파일을 다운로드한 후에 플레이하는 방식이 점점 늘고 있다. 사실 종이책이나 DVD, 블루레이는 소설, 영화 등이 들어있는 그릇에 불과할 뿐 콘텐츠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인터넷 인프라의 확장으로 유통과 소비에 있어 껍데기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어 파는 사람은 유통 비용을 줄이고 사는 사람은 매장까지 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더는 것이니 모두 윈-윈 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의 저작권법에는 권리소진원칙(또는 최초판매원칙)이 존재한다. 저작권자가 한번 저작물을 정당한 대가를 받고 팔았다면 소비자가 그 저작물을 어떻게 처분하든지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소비자는 그 저작물이 화체되어 있는 유형물에 대하여 저작권자의 배포권이 절단된 상태의 소유권을 취득한 것일 뿐 그 저작물 자체에 대한 저작권까지 취득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영화 DVD를 샀더라도 그 영화 파일을 추출 후 복제하여 전송해서는 안되며 만화책을 스캔하여 전송해서도 안된다. 다만 영화 DVD나 만화책을 제3자에게 대여하거나 파는 것은 상관없다. 돈 주고 산 책 마음대로 빌려주지도 팔지도 못한다면 그것을 납득할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권리소진원칙은 일반인의 법 감정을 법원칙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권리소진원칙은 디지털 저작물을 몰랐던 20세기 초에 등장한 이론이다. 따라서 저작물을 사고파는 행위도 핸드 투 핸드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런 고전적인 방식이 사라지고 있다. 클릭 한 번에 이미 영화는 스마트폰에서, TV에서 플레이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나는 그 영화를 소유한 것인가. DVD로 안 샀으니 이제 그 영화는 나만 보면 끝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넘겨줄 수 없는 것인가. 사실 손에 든 것이 없으니 넘겨줄 방법도 없다. 디바이스를 통째로 넘겨주거나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저작권자와 소비자는 항상 긴장관계에 있어 왔다. 사업자는 가능한 많은 수익을 남기려 하고 소비자는 싼 가격에 사서 재판매를 통해 비용을 회수하려고 한다. 하지만 인터넷 전송 방식을 통한 구매는 서비스 업자가 재판매 시스템을 구축해 놓지 않은 이상 소비자가 DRM을 뚫고 제3자에게 재판매나 대여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권리소진원칙이 서비스의 특성상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다.

MS는 작년 6월 유형물로 존재하기 때문에 권리소진원칙 적용이 가능한 게임 패키지까지 중고판매를 제한하려 하였다. 많은 게이머들이 들고 일어나자 MS는 그 정책을 보름 만에 철회하였다. 디지털 콘텐츠의 중고거래가 가능한 시스템 특허를 애플과 아마존이 출원하기는 하였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사업 움직임은 없다. 사실 신품의 라이선스비가 유일한 수익원인 저작권자들에게 소비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중고거래 시스템을 지원하도록 요구하는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디지털 콘텐츠는 아날로그와 달리 원본이 남은 상태에서 복제본이 넘어가기 때문에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사업자가 망하기 딱 좋은 구조다.

포워드 앤드 딜리트 시스템을 구축하면 어떨까. 즉 양도인은 전송과 동시에 삭제되고 양수인만이 그 콘텐츠를 가지게 된다. 무한복제의 위험은 사라지고 아날로그 양도와 같은 외형이 된다. 그래도 사업자는 불만이다. 시스템을 구축하긴 했지만 시스템 운용 및 유지비용, 특히 보안비용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사업자에게도 일정 부분 수익이 돌아가야 한다. 재판매에 따른 일정한 수수료의 부과가 필요하다.

또한 계정공유는 어떨까. 전송 앤드 다운이 아닌 전송으로만 시청이 가능한 스트리밍 환경에서는 넘겨줄 만한 파일도 없다. 그럼 그 계정을 여럿이 공유하는 것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콘텐츠를 공유하는 것이다. N 스크린도 같은 개념이다. N 스크린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디바이스를 소유한 상태에서 어느 디바이스에서든 콘텐츠가 돌아갈 것을 예상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 디바이스가 한 사람 소유라는 것을 사업자는 알 방법이 없다. 계정만 같으면 되기 때문이다. 권리소진원칙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저렴한 가격으로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정 공유도 사업자들의 정책적 고려에 맡길 것만이 아니라 법문에 그 근거를 둘 필요가 있다. 앞으로 세상은 더 디지털화 될 것이다. 몸이 커졌으면 수선해서 입는 것도 한계가 있다. 새 옷도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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