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지원 대한변협에 요청한 박준영 변호사

매주 월요일 아침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대한변협 대회의실에서는 상임이사회가 열린다. 얼마 전 상임이사회 일정에 갑작스레 특별안건이 추가됐다. 일전에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보도돼 사회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그 김신혜씨 재심사건을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지원해 달라고 한 청년변호사가 찾아온 것이다. 그가 바로 경기중앙회 소속 박준영 변호사(연수원 35기)였다. 그는 PPT 파일까지 준비해서 사건의 경위와 재심의 필요성, 왜 대한변협이 지원해야 하는지 여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김신혜의 진정성은 아직 알 수 없으나 박준영의 진정성은 느껴졌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임원들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변협 인권위원회에서 논의한 끝에 법률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프로필을 찾아 보았다. 최종학력이 1994년 완도 노화종합고등학교 졸업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보기 드문 고졸 출신 변호사다. 사법시험은 44회로 붙어 연수원은 35기로 수료했다. 2006년에 수원에서 개업했고, 이미 국선형사사건 재심사건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2008년 수원역 노숙소녀 살해사건을 국선으로 맡아 5년에 걸쳐서 피고인들의 무죄를 대법원에서 받아냈고, 이미 유죄확정 되었던 2명의 재심결정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변호사의 공익활동 관점이나, 청년변호사의 분투기 관점이나, 고졸 청년의 인생역전의 관점이나 무엇으로 보아도 우리신문 특종 인터뷰감이다. 그날 바로 박 변호사와 통화하여 인터뷰를 하기로 했으나 피차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얼마 전에서야 수원 그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변협 인권위원회에서 김신혜 사건 재심을 검토하기로 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내가 요즘 관여하는 간첩사건 변호 때문에 인권위원회에 대한 나의 보고가 조금 늦어져 지체되고 있다. 죄송하다. 곧 변협 인권위원과 함께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된 김신혜씨를 만나러 간다. 물론 내가 이미 김신혜씨를 만나 변협에서 김신혜씨의 재심지원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은 알려줬다. 빨리 변협의 재심지원결정을 받아내어 김신혜씨에게 좀 더 큰 희망을 주고 싶다.

국선형사사건을 하면서 주로 사회적 약자 변호에 열심이지 탈북자들에 대한 간첩죄 변호사건도 수행하고 있는줄 몰랐다. 변호의 경위를 알고 싶다.

지난 9월 5일 민변 소속변호사들과 함께 변호를 했던 탈북자 홍모씨 사건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아직 간첩죄 사건이 2건 더 있는데 이것만 마치면 정말로 국가보안법 사건은 사양할 생각이다.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힘들고, 이러다가 굶어죽을 정도로 사무실운영이 엉망이 되었다. 처음에 지인의 요청이 왔을 때 사실 많이 망설였다. 나는 민변도 아니고,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하는 그저 평범한 한국의 보통변호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국가보안법사건을 무료변론할 경우 확신범이 아니면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의식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민변에서도 지원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뭘 모르는 나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한다(웃음). 고민하다가 도와주기로 결정한 것은 이념과 변호를 구별했기 때문이다. 이념적인 부분을 걷어내고 보면 간첩으로 몰린 홍모씨와 같은 사람이 결국 내가 도우려고 하는 사회적인 약자일 뿐이다. 그래서 변론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간첩사건을 맡은 이후 사무실 운영이 너무 힘들어졌다. 간첩사건은 구속사건인데 기일이 빨리 돌아오고, 기록도 1만 페이지가 넘고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사무실이 국가보안법 사건 기록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간첩사건을 하게 되면 사회적인 편견도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다. 사건 수임에도 방해가 되지 이익은 아니다. 그동안 국선사건 위주로 사무실을 운영하다가 자신감이 생겨 로스쿨 출신 2명의 고용변호사를 두고 사건의 다각화와 변신을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간첩사건에 다들 매달리다보니 사무실이 적자가 발생했고, 결국 얼마 전에 고용 2명 모두 내보냈다. 고생도 많이 했는데 그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현재 국정원에서 조사중인 간첩사건에 많은 법률상의 문제가 있고, 도움의 필요성도 실감하지만 나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사건만 마치고 앞으론 간첩사건은 무조건 거절할 생각이다. 민변의 장경욱 변호사님 같은 분이나 지금 간첩사건을 맡고 있는 분들에게 죄송하다. 그분들은 정말로 박수를 받아야 한다.

김신혜 사건으로 돌아가자. 어떻게 해서 김신혜 사건에 관여하게 되고, 변협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는가.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 재심 이후 국선 재심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적지 않은 재심사건을 맡고 있다. 김신혜 사건은 SBS에서 재심의 가능여부에 대한 법률검토를 해달라고 부탁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예전 2008년 수원역 사건에서 살인범으로 몰린 학생들 4명의 국선을 맡아 기록을 검토하면서 그들의 무죄를 확신했었다. 그 사건을 처음 맡았을 때 “이 사건이 내 인생을 바꿀 사건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신혜 사건도 SBS요청으로 청주여자교도소를 방문하여 2시간 30분간 그녀를 면담하면서 단 1분도 그녀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의 수원역 사건처럼 나와 어떤 운명적인 인연이 있는 사건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그래서 돕기로 하고 재심가능여부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유죄확정 판결의 주심대법관이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조무제 전 대법관이었다. 긴장이 되었다. 물론 그 당시는 위법수집증거의 증거능력이 인정되었고, 그 이후 판례가 변경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가 요즘 재심사건을 많이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주요 재심사건을 지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유죄확정된지 34년만에 재심을 받게 된 일본 복서사건도 일변연이 지원한 사건이다. 그리고 내가 나의 공명심만 생각한다면 변협의 요청없이 나 혼자 재심법률구조를 해도 되지만(사실 지금 적지 않은 사건을 그렇게 하고 있다), 정말로 김신혜씨를 석방시키고 싶어서 변협에 SOS를 친 것이다. 다행히 지금 위철환 협회장님이 수원 출신이고, 아는 사이라서 부탁을 드렸더니 기회를 주셨다(웃음).

본인이 인생을 바꿀 사건이라고 확신했던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을 좀 설명해달라. 정말로 그 사건이 본인의 인생을 바꾸었는가?

2007년 수원역 노숙소녀를 살해했다는 7명 중 4명의 1심 국선을 내가 맡았는데 그 4명도 검사 앞에서 자백을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유죄가 확정된 공범들도 안 죽였다고 하고, 나 역시 무죄를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하였다. 한 2년이면 끝날 줄 알았더니 재심사건까지 모두 끝나는데 5년이 걸렸다. 소녀를 죽였다는 4명의 피고인에 대하여 1심에서는 유죄가 나오고,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나는 2심에서는 무죄판결을 확신했다. 솔직히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라서 나는 기자들이 사무실로 몰려올 줄 알았는데 소문내지 않으니 아무도 오지 않았다(웃음).

그래서 대법원 판결 선고 때에는 내가 보도자료식으로 자료를 만들어 아는 기자들에게 보내고 했더니 언론에서 좀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 사건 이후 재심사건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언론의 주목도 받아서 사건을 믿고 맡기는 사람도 늘었다. 그런데 솔직히 많은 형사사건을 했지만 주로 블루 칼라 범죄만 하니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람은 있다. 박 이사님이 이렇게 인터뷰 하러 오셨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웃음)!

재심형사사건을 많이 다룬 것으로 안다. 그리고 우리법원은 재심에 아주 인색하다. 재심에 대한 본인의 의견이 궁금하다.

일본과 우리는 법제도가 비슷하다. 형사소송법에 대한 재심규정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에 비하여 너무 재심결정율이 너무 낮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변협과 함께 재심에 대한 법원의 인식을 개선시켜 보고 싶다.

프로필의 학력을 보면 완도의 종고졸업이 전부이다. 정말로 고졸학력이 전부인가. 어떻게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는가?

고향이 완도다. 완도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광주로 고등학교 유학을 갔다. 중학교 때는 꽤 공부를 잘했다. 광주로 유학 가서 바람이 들었는지 타락했다. 그땐 모든 것에 불만이었다. 가난한 것도, 아버지도, 세상도…. 그래서 방황했고, 유기정학, 무기정학…정말 문제학생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고등학교 졸업장만 제발 따자고 애원하셔서, 다시 완도로 돌아와 1년 후배들과 함께 특수학교인 노화종고를 졸업했다.

종고에서 취업반(직업훈련반)이었는데 졸업 후 수능을 봤더니 120점이 나와 목포대 전자공학과에 장학금 받고 입학했다. 1학년 2학기 때 영장이 나오고, 장학금이 유지된다고 해서 흔쾌히 군대에 갔는데 제대해 보니 유지가 안 되어 학교를 그만 뒀다. 변호사 된 다음에 방송통신대학에 입학은 했는데 바쁘다보니 아직 졸업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고졸 학력이다.

군대 한달 고참 때문에 고시공부를 하게 되었다. 고참이 신림동으로 고시공부하러 간다고 하기에 양어장에서 일하다가 1997년 7월 무작정 나도 신림동으로 갔다. 곽윤직 민법책에 한문을 못 읽어서 옥편을 찾아서 시작한 법공부이다. 1999년 2월 1차시험에 2점차로 떨어져 자신감을 가졌고,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실 중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에서 생활비 지원이 끊어져 포기할 뻔 했다. 다행히 외참촌이 매달 60만원을 지원해 주셔서 시험에 붙을 수 있었다.

보니 사법연수원에서 1년을 쉬었다. 그리고 수원에 개업을 하였다. 빨리 수료해서 돈 벌어야 할텐데 왜 그랬나?

시험에 붙었다고 인생이 녹녹지 않았다.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외삼촌이 사업을 한다고 하시기에 1억원을 대출해드렸는데 외삼촌 사업이 망해 카드빚을 돌려막기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연수원 생활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채무증명서’를 가지고 휴직을 하였다. 연수원 지도교수님이 채무증명서로 휴직한 놈은 연수원 역사상 너밖에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셨다. 휴직한 1년 동안 과외도 하고, 열심히 돈을 벌어 빚을 갚았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빨리 연수원 수료하고 변호사 되어 돈을 벌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1년만에 복직하여 35기로 수료하였다.

수료하고 서울에 취직하려고 했는데 뽑아 주는 곳이 없어서 수원으로 내려온 것이다. 솔직히 삼성 같은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내세울 것이 없지 않는가!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마라톤이다. 마라톤을 종주하면 의지력과 성실성이 입증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프마라톤을 1번 뛰고 42. 195km 종주에 도전했다. 하프 뛸 때는 할만 했는데 30km를 넘어가니 정말 죽는줄 알았다. 삼성에 취직할 마음으로 완주를 했다. (웃음). 그런데도 삼성에서도 다른 대기업에서도, 로펌에서도 안 뽑아주었다. 그래서 겨우 취직된 것이 수원의 개업한 연수원 교수님이었던 윤창섭 변호사님 사무실이다.

과외가 아니라 결혼을 해서 빚을 갚을 생각은 안 해봤는가. 속된 말로 팔려갈 생각 말이다.

솔직히 왜 그런 생각을 안 해봤겠는가!! 연수원 다니면서 빚만 갚아주면 결혼하겠다고 수없이 선을 봤다. 그런데 나의 학력, 나의 조건은 선시장에서도 좋은 물건이 아니었다. 결국 선을 봐서 빚쟁이 신세를 모면하는 것은 포기했다. 내가 변호사되어 벌어서 빚을 갚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부인과 애들이 2명이다. 그러면 부인은 어떻게 만났는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님이 새장가를 가셨다. 새어머니와 함께 공장에서 일하던 분이 장모님이시다. 장모님댁도 우리집처럼 가난한 집이었다. 두 분의 소개로 집사람을 만났다. 집사람을 만나는 순간 ‘이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너무 예쁘고 너무 착한 사람이다. 그때 선시장에서 팔려가지 않고 집사람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이제 내가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집사람에게 미안하다. 아직 월세집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처자직 굶기지 않을 자신은 있다. (웃음).

개업할 돈도 없으면서 어떻게 개업을 감행하였는가.

수원에서 고용으로 있을 때 월급이 500만원이었다. 그런데 빚도 많고, 부양할 가족도 많다보니 500만원으로 생활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윤 변호사님이 많아 도와주셔서 그럭저럭 한달에 1000만원 수입은 된 것 같다. 그렇지만 항상 개업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개업만 하면 고용수입 이상은 할 것 같은 자신감은 있었지만 돈이 없어 개업할 엄두를 못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 대한변협 협부회장으로 계시는 이정호 변호사님이 (그 당시 수원회의 부회장이셨다) 1년간 미국으로 유학을 가시면서 사무실을 월세만 내고 사용하게 해주셔서 과감하게 개업을 했다.

누가 나에게 사건을 보내주겠는가! 처음에는 열심히 국선사건을 맡아서 했다. 그당시 영장실질심사에 필요적 국선이 실시돼 운도 좋았다. 정말 열심히 했다. 추석이나 설날 연휴 때 고향에 가지 않고 국선사건을 전담하다시피 하다보니, 국선재판부에도 소문이 나서 계장이 직접 전화해 사건을 부탁하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국선을 하지 않는다. 비약을 꿈꾸며 고용 2명을 두었다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은 다시 원점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사실 로스쿨 변호사 2명을 고용하면서 사업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은 변화를 꾀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형사국선만 하면서 평생을 살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함께 어울려 시스템도 구축해보고, 사건도 다각화를 해보려고 ‘노력하는 변호사그룹 새봄’이란 이름도 정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간첩사건을 맡게 되면서 (물론 핑계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다시 혼자 직원 1명 두고 사무실을 하는 사정이 되었다. 며칠전 두 사람이 나갔다. 솔직히 앞으로는 투잡(two job)을 할 생각도 한다. 화이트칼라 범죄는 많이 해보지 못했지만, 형사사건을 많이 해서 형사소송법 강의나 형법 강의에 자신이 있다. 설명을 잘하는 재능은 좀 타고난 것같다. 특이한 형사사건을 많이 해서 책을 쓰자는 출판사의 제안도 있는데 간첩사건 때문에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

나머지 2건 간첩사건이 정리되면, 사무실을 서울로 옮길 생각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가족 전체가 강남으로 가고 싶었다. 고졸의 한계, 인맥의 한계를 많이 느꼈기 때문에 내 애들만은 중심인 강남에서 시작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음을 바꾸었다. 내 가정과 가족의 욕심을 챙기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게 변호사의 사회적인 책임’ 운운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반성을 했기 때문이다. 집사람이 착하고, 욕심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다. 사무실 확장한다 하면서 아직 월세를 사는데 이해하고 불만이 없다. 확실히 장가 잘 갔다. (웃음)

출퇴근은 하더라도 사무실은 서울로 옮길 생각이다. 아무래도 서울에 모든 것이 몰려있어서, 사람들과 연대하여 뭘 도모하여 보려고 해도 서울이 용이할 것 같아서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뭘 해도 처자식은 굶기지 않을 자신은 있기 때문에 지금상황이 두렵지는 않다. 잘할 자신이 있다.

그대도 힘들지만 모든 청년변호사들이 힘들다. 고생의 대표선수로서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부족한 사람이지만 매번 마라톤 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살려고 한다. 우선 후배들에게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 인생이 그랬다. 절대 포기하지 않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서로 사람을 개념지우고, 편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졸변호사로서도 느꼈지만 이번에 간첩사건을 하면서 좀 더 그런 것들이 얼마나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 안 좋은 것인지 알았다. 마지막으로 주제넘지만 우리 변호사들이 힘들고, 어렵지만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와 연대의식을 더욱 넓혀갔으면 좋겠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고 하는데, 박준영 변호사에게 강하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보다 어렵게 살고 있는데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미래가 불투명한데 나보다 훨씬 자신감이 차 있고, 용기가 있었다. 그의 행보가 궁금하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가는 후배변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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