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고등법원 2014. 6. 11. 선고 2013나36486 판결을 중심으로 -

1. 사실관계 및 대상판결의 요지

A저축은행 대표이사 甲은 2009년 초경부터 乙에게 저축은행의 유동성확보를 위하여 경영상 긴급한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대출차주 명의를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乙은 지인들인 피고들에게 법인명의를 빌려줄 것을 부탁하였고 피고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乙에게 피고들 및 피고들이 운영하는 회사의 인감도장 및 인감증명서를 건네주었으며, 이에 A저축은행 대표이사 甲은 서울사무소에서 피고들 명의의 여신거래약정서를 작성한 다음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으로 기존 부실대출을 정리하는 등에 사용하였다.

이후 A저축은행은 파산선고를 받아 파산관재인으로 원고(예금보험공사)가 선임되었고, 원고는 피고들을 상대로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의 변제를 구하는 대여금채권 반환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본 사안에서 피고들은 피고들 명의의 여신거래약정서가 권한을 넘어 작성되었고, 甲 또는 乙에게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의 출금 및 사용권한까지 부여하지는 않았으며, 여신거래약정상의 대출금이 피고들에게 실행되지 않았다고 다투었다.

제1심은 피고들의 인장을 도용당하였다는 취지의 주장을 기각하고 여신거래약정서가 적법하게 작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제1심은 피고들 명의의 A저축은행 보통예금거래내역에는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대출금이 지급되었는지에 대한 기재가 없는 점, 여신거래약정에 따른 대출통장이 피고들에게 교부되지 않았고 A저축은행이 이를 보관한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A저축은행이 피고들에게 대출금을 지급하였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보아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그러나 제2심(대상판결)은 피고들의 인장도용항변을 배척한 후 피고들이 乙을 통하여 甲에게 피고들의 인감도장 및 인감증명서를 교부하였는바 여신거래약정서 작성 및 대출금의 사용권한까지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고, A저축은행의 전산상 자금이 인출되거나 다른 계좌로 이체되는 내역이 나타난 경우 이는 실제로 그와 같은 거래가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제1심의 판단과 달리 피고들에게 대출금이 실행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아래에서는 피고들이 乙에게 피고들 명의의 인감도장 및 인감증명서를 교부한 사실로 피고들이 甲 또는 乙에게 여신거래약정 체결 권한을 위임하였다고 볼 수 있는 여부,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 출금 및 사용 권한까지 위임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이 실제로 피고들에게 실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살펴본다.

2. 피고들이 甲 또는 乙에게 여신거래약정 체결 권한을 위임하였는지 여부

제2심은 피고들이 乙 또는 A저축은행의 직원에게 차명대출 등을 위한 관련서류(인감도장, 인감증면서 등) 및 대출금 출금을 위한 서류(출금전표)를 작성·날인하여 주었다고 사실인정을 하면서 피고들이 甲 또는 乙에게 여신거래약정 체결 권한을 위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임의대리권의 범위는 수권행위의 해석에 의하여 결정되는데 명시적인 수권행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수권행위가 묵시적으로 행해졌거나 주위 사정으로부터 추단되는 경우 대리권의 범위는 주위사정이나 거래관행, 추단되는 당사자의 의사 등에 의하여 결정될 될 수 있을 것이다.

판례는 아버지가 아들의 채무에 대한 담보의 제공을 위하여 아들에게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를 교부한 행위는 복임권을 포함하여 채무 담보를 위한 일체의 대리권을 준 것이라고 판시한 사례가 있고(대법원 1996. 2. 9. 선고 95다10549 판결), 부동산 매도를 위임받은 대리인이 자신의 채무 지급을 담보하기 위하여 그 부동산에 관하여 양도담보계약을 체결한 사안에서, 대리인이 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와 인감도장을 모두 교부받아 이를 상대방에게 제시하며 부동산을 처분할 대리권이 있음을 표명하였다면 상대방으로서는 대리권이 있다고 믿는 데에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본인에 대해 직접 대리권 수여 유무를 확인해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 사례가 있는바(2009. 11. 12. 선고 2009다46828 판결), 대상판결 역시 피고들이 乙을 통하여 甲에게 인감도장 및 인감증명서 교부하였다는 구체적 사실에서 여신거래약정 체결에 관한 포괄적인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추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피고들은 乙로부터 구체적인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인감도장 등을 빌려달라는 乙의 부탁을 받고 아무런 대가 없이 乙에게 인감도장 등을 건네주었을 뿐 명시적으로 甲 또는 乙에게 여신거래약정 체결 권한을 위임한 적이 없는 점(피고들은 A저축은행 대표이사 甲과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한 적이 없음), A저축은행측은 피고들에게 대출금액, 대출기간 등에 관하여 아무런 설명 없이 A저축은행 서울사무소에서 피고들 명의의 여신거래약정서 등 대출에 필요한 서류 일체를 임의로 작성한 점, 특히 A저축은행 측은 여신거래약정서 작성에 있어서 일반적인 대출심사에 필요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피고들로부터 아무런 담보도 제공받지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인감도장 및 인감증명서 교부사실로 수십억 원에 이르는 여신거래약정 체결 권한을 위임하였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보인다.

3. 피고들이 甲 또는 乙에게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 인출 및 사용권한을 위임하였는지 여부

제2심은 피고들이 A저축은행 대표이사 甲에게 여신거래약정에 다른 대출을 위하여 피고들의 명의를 빌려주면서 각 여신거래약정에 따른 대출금의 출금 및 사용권한 역시 甲에게 위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하였다.

즉, 대상판결은 피고들의 인감도장 및 인감증명서 교부사실로 여신거래약정이 체결 권한 및 더 나아가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 사용권한까지 부여한 것으로 본 것이다.

대리권의 범위에 관하여 판례 중에는 매매계약을 체결할 대리권을 수여받은 대리인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매매계약에서 약정한 바에 따라 중도금이나 잔금을 수령할 수 있다고 판시한 사례가 있다(대법원 1992. 4. 14. 선고 91다43107 판결).

그러나 본 사안에서 乙은 피고들로부터 인감도장 및 인감증명서를 건네받으면서 그 사용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 만일 甲 또는 乙이 피고들에게 피고들 명의로 수십억원에 이르는 거액(많게는 90억원)의 여신거래약정서를 작성한 다음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으로 기존 부실대출을 정리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면 피고들이 인감도장 등을 건네주었을지, 乙에게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를 교부할 당시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에 관한 법적, 경제적 책임을 부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지 의문이다. 본 사안에서 피고들은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이 피고들이 모르는 용처에 집행되는 것을 용인한 것은 아닌바, 피고들이 乙에게 자신들의 인감도장 등을 건네주었다고 하여 곧바로 甲 또는 乙에게 거액의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을 인출하여 사용할 권한까지 위임하였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것이다.

4. 피고들에게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이 실제로 실행되었는지 여부

제1심은 A저축은행이 피고들에게 대출금을 각 지급하였다는 점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로는 보통예금거래내역 및 각 종합거래현황의 각 기재가 있으나 위 각 보통예금거래내역 및 각 종합거래현황에는 주채무자인 피고들 명의의 대출금이 지급된 일시 및 액수가 기재되어 있을 뿐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지급되었는지에 대한 기재가 없으며, 위 증거만으로는 A저축은행이 피고들에게 대출금을 지급하였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하였다.

그에 반하여 대상판결은 A저축은행의 전산상 자금이 인출되거나 다른 계좌로 이체되는 내역이 나타난 경우 이는 실제로 그와 같은 거래가 일어난 것으로서 보통예금거래내역 기재와 같이 피고들에게 대출금이 실행되었다고 판시하였다.

그러나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면 피고들은 위 대출금을 자유롭게 출금할 수 있어야 하는데 A저축은행이 피고들 명의의 통장을 보관하였는바 피고들은 여신거래약정에 의한 대출금을 인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원고는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는 근거자료로 피고들의 인감도장을 이용하여 미리 작성한 피고들 명의의 출금전표를 제출하였는데, 은행창구에서 출금전표로 출금을 하는 경우에는 ① 통장 및 도장을 소지한 상태에서 ② 출금용 종합전표를 직접 작성하신 후에 ③ 통장과 출금전표를 함께 은행창구 직원에게 직접 건넨 다음 ④ 전산처리를 위하여 통장 비밀번호를 본인이 직접 입력하여야 한다.

그런데 피고들 명의 통장은 A저축은행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바, 피고들이 종합전표를 이용하여 여신거래약정상의 대출금을 인출하였다는 것은 거래의 통념상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A저축은행 대표이사 및 직원은 제1심에서 피고들 명의 계좌를 이용하여 전산상으로만 기존 부실대출을 변제한 것과 같은 외관을 만들었을 뿐 여신거래약정에 의한 대출금이 피고들에게 실제로 실행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그렇다면 본 사안의 여신거래약정서상의 대출금은 실제로 피고들에게 실행된 것이 아니라 A저축은행측에서 피고들 명의의 출금전표를 임의로 작성하여 여신거래약정상의 대출금 인출행위가 이루어진 것과 같은 외관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결론

본 사안은 실제 자금을 필요로 하는 자가 사실상 또는 법령상 장애로 인하여 직접 자기 이름으로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경우 금융기관의 양해 내지 합의 하에 제3자의 명의로 대출이 이루어진 전형적인 차명대출 사안이 아니라, 피고들은 피고들 명의로 차명대출이 이루어진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채무를 부담하려는 의사 없이 乙의 요청으로 단지 피고들의 인감도장 및 인감증명서를 건네준 사안이다.

대상판결은 차명대출의 명의인인 피고들이 여신거래약정서 체결 및 대출금 사용권한을 부여하였는지, 대출금이 실제로 실행되었는지 여부에 관하여 중점적으로 다투어졌고, 비록 대상판결로 파기되었으나 제1심에서 대출금이 실행되지 않았다는 피고들의 주장이 처음으로 받아들여진 사례인바, 현재 진행 중인 본 사안과 유사한 관련 사건에서 이 부분에 관하여 면밀한 심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