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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_2]오석락 변호사님 추모, 그 이후
박형연 공보이사  |  iamric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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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호] 승인 2014.07.21  11: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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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자 대한변협신문을 통하여 지난 3월 25일 별세하신 오석락 변호사(고등고시 7회)에 대한 추모의 글을 올렸다. 그 이후 역대 협회장님을 포함한 몇분의 원로 선배변호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좋은 기획이라는 칭찬의 말들이었다. 그 기사를 계기로 오변호사님 유가족을 만나 고인의 마지막 근황의 소식을 알게 되었고 추모글의 연장선상에서 그 소식을 대한변협신문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추모글에서 명우회에 대하여 언급했다. 서소문 법원시절 명지빌딩에 위치한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의 모임이었다. 그 명우회는 지금도 늠름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회장(정운수, 변호사 박승준 법률사무소 사무국장)과 총무(이주학, 정부법무공단 법무2팀장)가 기사를 보고 협회로 나를 찾아왔다. 장례식장을 찾지 못한 아쉬움과 모금한 작은 정성의 부의금을 대신 전달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도 세월의 야속함으로 오 변호사님 사모님이나 가족들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단다. 그들과 만나 환담을 하여 보니, 내가 궁금해 하던 명우회의 실재(實在)는 확인되었고, 지금도 그 역전의 용사들이 모임을 계속하면서 봉사도 하고 친목도 다진다니 우리 선배들이 변호사를 하던 시절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낭만적이고 의리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민사,형사 소송실무편람’이란 책을 펴낸 설동주씨는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자신도 명우회 멤버였는데 자신과 오 변호사 사이의 추천사에 관련된 추억과 그 추억이 기록된 오석락 수필집 ‘보이지 않는 법정’ 해당부분을 복사하여 편지와 함께 보내온 것이다. 오석락 변호사가 그 책의 추천사를 써주었고, 그 추천사로 인하여 책이 히트를 쳤다고 자신이 감사를 표하였고, 오 변호사는 좋은 책에 추천사를 써서 행복했었다는 두 남자의 운치있는 일화가 그 수필에 기록되어 있었다. 설씨는 그런 분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으로 편지의 끝을 맺고 있었다.

▲ 1981년 내셔널 컬리지 동료들과
수소문 끝에 다행히 장녀인 오인주씨를 압구정 현대백화점 커피숍에서 만났다. 소식을 전하고, 들으면서 안타까운 것은 사망의 직접 사인인 간경화의 이유 부분이다. 술을 많이 드신 것이 아니라 2002년인가 수혈을 받으셨는데 그때는 수혈시 C형간염 바이러스에 대한 체크가 되지 않는 시절이라 이유없이 C형간염의 보균자가 되셨고, 조심을 했지만 결국 1년전쯤 간경화가 와, 그것으로 인해 결국 돌아가셨다고.

그 소식 이외에는 오 변호사님은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사모님은 지금도 건강하시고 댁은 압구정동이다. 오 변호사님은 슬하에 1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두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의사이고, 후손 중에 법조인은 없었다. 손녀딸이 이번에 미국에서 로스쿨에 들어가서 할아버지의 뒤를 잇게 되어 가족들이 좋아했단다. 따님이 두분이나 되는데 사위를 법조인으로 맞을 생각은 없었는지 물었더니, 엄마 마음이야 법조인 사위를 맞고 싶었는데 오 변호사님은 자식들에게 그런 것은 강요할 것이 아니라고 조심스러워 하신 분이었다고. 그래서 장녀의 남편은 법조인이 아닌 의사였다. 둘째 딸은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 대한변호사협회장기쟁탈 전국사무직원축구대회에서
아들과 딸들이 무척 효자, 효녀라서 일년에 몇 번씩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을 다닌 모양이다. 특히 아들은 바쁜 의사생활 중에도 매주 부모님을 찾았다고. 혼자 계신 어머니를 한달에 한번 정도 겨우 찾아뵙는 내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반성이 되었다. 딸이 많아서 행복하셨던 것이 아니라, 효자아들을 두어 행복하고 외롭지 않으셨던 것이라고 했다. 딸이 보는 아버지 오석락은 대법관이 못되신 것에 못내 아쉬움을 지니고 사셨는데 말년에는 그것도 다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으로 여기고 여한이 없이 편안하게 지내셨다고 기억한다.

건강하실 때는 매일 학동역에 있는 사무실로 30분 정도 걸어서 출근을 하시고, 친구분들과 사무실 주위에서 소일을 하시고 집으로 걸어 돌아오시는 평범한 생활을 즐기시다가 병을 맞으셨단다. 추모글이 실린 신문을 2부 드렸더니, 나중에 오인주씨가 이런 문자를 내게 보내주셨다. “박 변호사님! 아버지에 대해 잘 요약하셔서 잘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가족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할 자료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족 모두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마음이 짠했다.

내가 오석락 변호사 추모글을 쓰고, 다시 그 후기까지 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비록 우리 법조계에 서서히 낭만주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지만, 그 낭만주의가 가진 장점, 서로 정을 나누고 추억을 만드는 전통이 조금이라도 오랫동안 우리 법조계 안에 살아있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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