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지원공익센터 ‘감사와 동행’ 대표 고지운 변호사

 


지금까지 ‘변협이 만난 사람들’에서 만난 이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나 법조계에서 유명한 분들이었다. 그분들과 인터뷰는 어렵지 않았다. 우선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그분에 대한 많은 정보가 나온다. 거기서 취할 것과 버릴 것, 우리 신문에서 새롭게 조명할 것만 정하면 된다. 얼마전 편집회의에서 인터뷰 대상을 도처에서 활약하는 청년변호사들로 확대하자는 제안에 따라 그 시작으로 조계종 총무원의 정병택 변호사를 만났다. 그 인터뷰 기사가 나가자 중견변호사로부터 로스쿨 출신 변호사인데 1년 이상 자비로 이주민들에 대한 법률지원사업을 실천하고 있는 여리고, 어린 그렇지만 대화를 해보면 선배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청년변호사가 있다고 추천을 해주었다. 우리를 반성하게 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후배. 호기심이 생기고 궁금해 바로 접촉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그녀가 근무하는 서초동 변호사교육문화관 5층 사무실에서 고지운 변호사(1978년생, 변시 1회)를 만났다. 고지운 변호사와 1시간 넘겨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추천한 사람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변협신문 역사상 가장 기수가 어린 변호사에 대한 인터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감동의 정도로 말하자면 ‘가장 큰 교감과 감동’을 받은 인터뷰였다.

 

월급 한푼도 받지 않고 1년 이상 이주민 법률지원을 하다가 2014년 4월부터 공익법인 공감에서 변호사자립지원사업으로 매월 100만원씩 지원받은 것이 유일한 수입이라는데 어떤 계기로 이주민 지원사업을 하게되었나?

변호사사험을 마치고 2012년 1월경 법무법인 덕수에서 6개월 의무연수를 했다. 학부는 연대를, 로스쿨은 이대를 나왔다. 관심분야는 어려서부터 의료분야였다. 그런데 배치된 곳은 건설팀이었다. 관심분야가 아니라서 힘들었다. 그곳에 계신 윤영환 변호사(사시 41회)가 이주민 지원 봉사단체인 ‘친구’를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봉사활동하는 재미가 위안이 되었다. 해보고 싶던 의료소송도 있었고, 주로 외국근로자들에 대한 법률지원 업무였다. 보람도 있었다. 6개월 의무연수를 마치고, 윤변호사님에게 그 봉사단체에서 근무를 제안하였다. 그때 주변에서 많이 말렸다. 당분간 월급도 없고, 여자변호사가 근무하기에 사무실 근무환경도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윤 변호사님이 사재를 털어 만든 ‘친구’에서 한 6개월 정도 월급을 받지 못해도 좋다고 결심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단체가 재정적으로 힘들어 월급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이미 시작한 이주민들에 대한 법률지원사업을 그만둘 상황이 아니라서 계속 하게 된 것이다. 단체는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혼자 일하다 보니 차라리 내가 이주민지원공익센터를 만들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지금은 단체를 만들어 이곳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사무실을 무료로 제공해 주셔서 이곳(교육문화회관 5층)에 사무실도 번듯하게 차렸고, 올 4월부터는 재단법인 공감에서 매달 100만원 일종의 월급을 받게 되었다. 대한변협 사랑샘 재단에서도 얼마 전부터 내 소문이 나서 매달 200만원을 우리 단체에 지원해 50만원은 나의 임금으로 책정하고 나머지 돈은 단체 경비로 사용한다. 졸지에 공익단체 대표가 되었다. 화장실이 깨끗해 너무 좋다(웃음).

 


돈한푼 안받고 거의 2년을 봉사하기가 쉽지 않다. 미련하기까지 해 보인다. 자기 속에 공익활동이나 봉사에 대한 소명의식이나 달란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운명인가 우연인가?

 

우연이 맞을 것이다. 윤 변호사님 단체가 아니었으면 6개월 연수마치고 관심 있는 의료법 관련 조그만 법인이나 다른 법인에 취직해서 고용변호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대학 다닐 때 책읽기 좋아하고, 집밖에 나가지 않고 공부 자체를 좋아하는 법대생일 뿐이었다. 고시에도 3번 정도 떨어졌고, 아르바이트를 해 일반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공부를 계획했다. 부모님은 그런 딸이 싫은지 무조건 취직을 종용했다. 세상과 어울리라는 것이다. 그때쯤 로스쿨이 생겼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지원해서 모교인 연대는 떨어지고 이대 로스쿨에 붙었다. 나에겐 행운이다. 소심한 나에겐 여자만 있는 이대가 너무 편했다. 30살에 들어간 로스쿨에서 즐겁게 지냈다. 부모님의 반대를 예상하여 3년치 학비를 모아 놓았는데 다행히 1년차 이후에 지원해주셔서 2년치 학비도 남았다.

처음에 이주민 공사활동에 지원할 때 윤변호사님이 돈을 못줄수 있다고 할 때 모아둔 돈 때분에 큰 고민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 봉사에 대한 소명의식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어려서는 의사가 되고 싶었고, 남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꿈은 확실히 있었다. 그래서 로스쿨에서 공익법학회, 의료법학회, 헌법학회 같은 활동이 재미있었고, 열심히 했다. 지금은 이주노동자를 위해 법률지원사업이, 하고 싶던 의료 관련 봉사처럼 만족스럽다. 몸을 움직여 남을 돕는 것이 즐겁다.

지금 수입이 150만원이다. 그 수입으로 평생의 직업으로 이 일을 계속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장기적인 계획은 무엇인가.

로스쿨 다닐 때 공익법학회에서 워크숍을 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공감이나 어필과 같은 공익법률단체의 선배님들, 김종철, 염형국, 황필규 변호사님과 같은 분들이 와서 강의를 해주셨다. 그분들은 이주민이나 난민 등 특수분야의 전문가가 부족하고, 할 일이 많다고 말씀해주셨다. 수입은 공감이나 어필같은 공익법인에서는 변호사들이 월급으로 약 200만원에서 시작해 잘하면 3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데 그 정도면 먹고 살만하고 보람이 있는 일에 헌신하는 즐거움으로 살만하다고 학생들을 자연스럽게 세뇌하셨다(웃음). 봉사에 관심있는 청년변호사들은 그런 선배들의 소박함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나도 지금 수입이 150만원인데 이것도 고맙다. 단체를 안정시켜서 200만원 정도 받게된다면 수입에 불만없이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어떻게 이 조직을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해 중단 없이 계속 유지시키는가 ’이다. 우선 부족한 인력은 로스쿨에서 실무수습생의 지원을 받을 생각이다. 이번에 변시 3회 김지현 변호사가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주민 지원에 관련된 연구용역 프로젝트도 수주해 수입을 확보하고 싶다. 요즘 대형로펌들이 만든 공익법인이 많이 생겨서 이쪽 분야 연구프로젝트도 적지 않다.

이주민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사람도 많다. 할 일은 많은가.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보람이 있는가.

다들 알지만 한국에는 이주근로자, 이주아동, 이주여성, 난민들이 아주 많이 들어와 있다. 이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사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권과 생존권의 사각지대이다. 직접 이들의 권리보호를 위하여 일하다 보면 이 분야에서는 우리는 후진국 같다. 변호사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분야이다. 그래서 내가 능력이 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이주민지원기금을 만들고 싶다. 이주민들에 대한 법률지원사업 즉, 법률봉사활동도 중요하지만 법적, 제도적 개선작업이 많이 필요한 분야이다. 외국 입법례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필요하다. 요즘 문제되는 것을 예를 들면, 외국에서는 구금시설로 분류된 외국인보호소가 우리는 구금시설이 아닌 점,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영장 없이 식당 등에서 외국인들을 검문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등이 연구되고, 토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업을 위해서는 기금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이주노동자들에 대하여, 그들을 돕는 나에 대하여 곱지않은 시각이 있는 것도 안다. 그래서 보람도 있지만 어려움도 많다. 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일이 많아 체력적인 한계도 많이 느낀다. 이주민들 중에 나쁜 사람들도 많다. 세상이란 원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섞인 곳이다. 그곳에서 그들을 돕고, 간혹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사람, 한국사람에 대하여 오해했다면서 감사하는 사람을 보면 피로가 풀린다. 그래서 힘들지만 평생 하고 싶다.

이주민 지원사업중에도 제일 관심이 있는 분야가 무엇인가?

이주근로자, 이주 아동, 이주 여성, 이주 난민들을 도와주는 활동을 하다보니 정말로 나의 도움이 필요한 분야, 내가 정말 하고싶은 일들이 생겼다. 내 경우는 농어촌 외국인근로자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하고 싶다. 이들이 가장 열악한 이주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꿈을 위해 단체를 만든 것도 있다. 직접 비영리 단체를 만든 것은 좋은 경험이다. 정관과 회의록을 만들고, 도와줄 이사님들도 규합하여 대표가 되어 세무서에 비영리단체 신고를 했다. 이번에 알게된 것이 비영리단체에는 “수익을 나누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꼭 정관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마음에 닿는다. 비영리단체는 수익을 나누는 단체가 아니라 보람을 나누는 단체이다.

 

 


영상인터뷰가 아니라 말로 하다보니 고변호사에 대한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 한 어른스러운 말들을 고 변호사는 정말 수줍게, 내성적인 태도로 한편으로는 명랑하게 아주 쉽게 말한다. 의지적이지도 않고, 선동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동료들 사이에서 그녀는 ‘게릴라 변호사’로 통한단다. 자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특공대처럼, 게릴라처럼 참지 못하고 달려가서 도움을 주는 모양이다.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친구였다. 서로 바빠서 식사도 못했지만 사람에 대한 따듯한 감동으로 배부른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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