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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대한변협 부협회장과 사무총장을 역임한 오석락 변호사님을 추모하며
박형연 대한변협 공보이사  |  iamric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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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승인 2014.06.02  10: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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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늦가을 이상규 변호사 초청으로 환경법학회 임원들이 저녁 모임을 가졌다. 왼쪽부터, 나(이상돈), 오석락 변호사, 이상규 변호사, 서원우 교수, 김이열 교수, 그리고 구연창 교수이다.

내가 오석락 변호사님의 부음을 접한 것은 법률신문의 짧은 부고기사를 통해서였다. 4월 3일자 기사에는 “오석락 변호사가 지난달 25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1956년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로 임용됐다. 서울고법 판사,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 서울민사지법 수석부장판사, 청주지법원장 등을 지냈다. 변호사로 개업해 대한변호사협회 사무총장·부협회장,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 등을 역임했다. 김기홍 전 대법원 판사와 동서지간이고, 고 김치열 전 법무장관의 매형(이 부분은 오기로 보인다. 확인해 보니 매형이 아니라 매제이다)이다.”

1934년생이니 나와 딱 30년 차이다. 그분이 대한변협 사무총장과 부협회장을 지냈는지는 몰랐다. 대한변협의 공보이사로써 협회의 임원을, 그것도 막강한 사무총장을 지낸 분을 위 부고기사 하나로 보내드리는 것이 허망하고, 아쉬웠다. 그래서 그 분에 대한 자료를 찾아 지금 이 추모의 글을 쓰고 있다. 또 고시동기 김동환 변호사님도 도움을 주셨다.

그는 경북 김천고등학교와 고대 법대를 나왔고, 고등고시 사법과 7회이시다. 법조인대관을 보니 고시 7회가 모두 30명인데 대부분 돌아가셨다. 김덕주 전 대법원장 외에도 최재호 대법관(사망), 이재성 대법관, 김진우 헌법재판관, 김태경 경기지사(사망) 등의 이름이 보인다. 김동환 변호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내성적이어서 사귐이 넓지는 않았으나 자기 주관이 뚜렷한 분이었다. 청주지방 법원장 시절에는 그 당시는 관례화 돼 있던 지역 기관장 모임도 안 나가셨다고 한다.

김동환 변호사의 회고 하나를 더 들어보자. 고등고시 7회 면접시험 때의 추억 같다. 시험에 붙고 구술시험을 준비하던 날, 다른 친구들은 다들 잡담을 하고 노는데 오석란 본인은 구석에 앉아 책을 열심히 보셨단다. 그때에는 구술시험에서 떨어지는 시대도 아닌 것을 보면 내성적이고, 학구적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세상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내면으로 침잠하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책을 적지 않게 쓰셨다. 나도 사법연수원시절 사서 읽은 기억이 나는 책, 법률서적의 명저로 불리는 ‘입증책임론’은 5판 이상 발행되었고, ‘공해소송의 제문제’란 책도 있다. 3권의 수필집을 냈다. 미니스커트와 법정(86년, 법률신문), 신변호사도(87년, 일신사), 보이지 않는 법정(92년, 법률신문사).

이런 분이 변협 사무총장을 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수필집에 보면 문인구 협회장님에게 차출이 되어 사무총장 일을 한 것으로 나온다. 지금은 변협 일이 늘어 사무총장이 거의 상근을 하는데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변협 직원의 말에 따르면 변호사가 되었다고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하신 것은 아니고 일만 보시고 바로 본인의 사무실로 돌아가신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문인구 협회장 때(1987년) 총무이사 겸 사무총장, 김선 협회장 때 (1995년) 부협회장을 역임하셨다. 회무에 관여한 후여서 그런지 사무총장을 할 때 쓴 수필집 ‘신변호사도’를 보면 변호사들이 이기주의와 냉소주의를 버리고 변호사의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글이 나오고, 개인적인 이야기보다 변호사들의 나갈 길(그래서 ‘신변호사도’가 제목 같다)에 대한 글이 많다.

수필집을 보면 청주법원장을 끝으로 변호사 개업이 아니라 대학으로 갈 마음을 굳혔는데 동서인 김기홍 전 대법관의 권유로 변호사로 방향을 선회한 이야기, 광림교회에 다니던 기독법조인들이 모여 애중회를 만들어 광림구조법인을 결정하려던 이야기(과연 실천이 되어 지금도 활동하는지 궁금하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법원과 변호사 사무실들이 있을 때 명지빌딩의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이 명우회를 1984년 12월 12일 결성하여 봉사활동 등을 하던 이야기 소개(이 모임은 어찌되었을까?), 본인이 미술 관람에 관심을 가지고 삼청동, 인사동의 미술관 순례를 하는 이야기(그래서 3권의 수필집의 표지는 모두 서양회화로 되어 있다) 등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같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나에겐 대학선배이기도 한 그분을 추모하면서 활동에 대한 한 장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올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았는데 다행히 함께 환경법학회 임원 활동을 하던 중앙대학교 이상돈 교수님의 블로그에서 추억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이교수님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 그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오석락 변호사님의 대한 추모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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