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대학가에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열풍이 있었다. 주옥같은 그의 책들 중에 지금도 강렬한 여운이 남는 책이 ‘양을 둘러싼 모험’이다. 유려하고 감각적인 문체, 독특한 서사 구조 등 하루키만의 특징이 잘 드러난 역작이다. 순하고 선한 이미지의 양이 이 책에서는 절대 권력과 힘을 상징한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하루키 소설 속 ‘양’에 해당하는 절대 권력에는 어떤 게 있을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필자에게는 인터넷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인터넷을 둘러싼 흥미진진하고 복잡한 모험이 진행되고 있다.

일반 대중에게는 아직도 낯선 인터넷 거버넌스라는 용어가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사용된다. 원래 인터넷 거버넌스는 인터넷프로토콜(IP) 번호, 도메인네임서버(DNS), 루트서버 등을 의미하는 기술적인 좁은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 관련 법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이슈 등 제반 정책사항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되어 쓰인다. 즉, 세계 인터넷 관련 기본 질서를 규정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애초 인터넷은 미국 국방부가 핵전쟁에 대비하여 고안해낸 산물이다. 당연히 미국의 자산이고 주도권을 갖고 있다.

물론 1990년대 후반 ICANN(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이라는 민간 기구에 그 권한을 위임하였다. 하지만 미국 상무성과 계약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국가와 단체들이 인터넷에 대한 숨겨진 미국의 영향력을 의심하고 있다. 특히 ITU(국제전기통신연합)로 대변되는 국제기구, 러시아, 중국, 브라질, 아랍 국가들이 그 반대편에 서 있다. 반대편의 논리는 분명하다. 이미 인터넷은 특정 국가의 자산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누려야 하는 공공재(public goods)가 되었다. 따라서 미국이라는 특정한 국가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현재의 구도는 변해야만 한다.

이런 와중에 지난 3월 14일 미국 정부는 인터넷의 미래를 바꿀 중요한 결정을 발표하였다. 2015년 9월로 종료되는 ICANN과의 계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 정부가 갖고 있던 인터넷 주소관리 권한을 내려놓겠다는 깜짝 놀랄만한 발표였다. 더 나아가 ICANN으로 하여금 전 세계 정부, 민간, 기업, 시민단체 등과 함께 인터넷 주소관리 권한을 이행할 합리적인 방안을 강구할 것을 요청하였다. 대신 전제조건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정 국가, 특정 기구로의 권한 이양이 포함된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인터넷 거버넌스에 관한 ‘다자간 협력 모델(Multi-stakeholder Model)’에 기반을 둔 해법에 대해서만 지지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대해 UN 반기문 사무총장과 ITU 사무총장은 즉각적인 환영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간 인터넷이 글로벌 공공재임을 누차 강조해 왔으며, 다자간 협력 모델은 UN과 ITU에서 논의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전격적인 발표를 하게 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그간 ITU, 러시아, 중국 등 미국 주도의 인터넷 거버넌스 체제에 거세게 도전한 세력에 대한 부담도 컸을 것이다. 특히, 2012년 두바이에서 개최된 ITU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WCIT)에서 압도적인 다수 국가들이 미국의 반대편에 섰다. 또한 지난해 에드워드 스노든에 의해 불거진 미국 국토안보국(NSA)의 광범위한 인터넷 감시에 대한 비판 여론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두바이 WCIT 당시 미국편에 섰던 EU 조차 스노든 사태 이후 미국의 인터넷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하는 쪽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형국이다.

미래 인터넷 지배구조에 대한 갑론을박과 백가쟁명이 지금부터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격랑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우리나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ICT 강국, 인터넷 강국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상에 걸맞지 않게 인터넷 거버넌스 논의에서는 아직도 주변국에 머물러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특히 올 10월 부산에서 ITU 전권회의가 열린다. 4년마다 열리는 ITU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ICT 분야 올림픽이라 불린다. 인터넷 거버넌스도 중요한 의제 중 하나이다. 시기적으로도 인터넷 주소권한 이양에 대한 로드맵이 한창 성숙할 시점이다.

바야흐로 ‘인터넷을 둘러싼 모험’이 시작되었다. 마침 우리나라가 모험의 주 무대이다. 생각이 너무나 다른 주체들이 함께 모험에 나서고 있다. 당연히 모험의 결과물은 개방적이고 공정하게 인류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인터넷이어야 한다. 모험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현명한 중재자가 필요하다. 우리의 역량과 지혜를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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