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민족 인권 변호사 가운데 한 분이셨던 가인 김병로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 18살의 젊은 나이로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총을 들고 일제침략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또 일제 강점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위해서 무료변론을 하시는 등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셨습니다.

105인 사건, 대동단 사건, 단천 농민 조합 사건, 여운형·안창호 등이 연루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흥사단 사건, 6·10 만세운동, 간도 참변, 정의부 사건, 대한광복단 사건 등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가인께서 변호한 사건은 무려 백여 건이 넘습니다.

193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변호사자격이 정지되자 선생은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시면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셨습니다.
창씨개명도 거부하셨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어언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여전히 우리 가슴 속에 겨레의 사표로 우뚝 서 계십니다.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가인 선생의 묘비는 다음과 같은 글귀로 시작합니다.

무릇, 시대의 탁류 안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는 거기에 굴종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피하여 숨어사는 사람이요,
다음 하나는 그 탁류와 더불어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는 만인 가운데서 하나를 만나기도 어려운 것인데,
그 같이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으로 모든 겨레의 흠앙속에서 살다가 애도 속에 가신이가 있었으니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 이시다.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대한민국의 법원조직과 운영의 기틀을 잡았던 가인 선생은, 대통령의 독재에 덮어놓고 따라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단호하고 의연한 자세를 지키며 사법부의 존엄과 권위를 확립하는데 힘쓰셨습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킨 정치파동이 있은 후 가인 선생은 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한 것처럼 형식을 갖춰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사법부의 독립은 가인 선생의 노력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법부의 독립과, 사법체계의 확립, 그리고 법관의 사명감 고취에 미친 가인 선생의 공로는 더없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가인선생 서세 50주년을 맞이하여 추모행사를 준비하신 양승태 대법원장님 이하 우리나라의 모든 법관들께서도 부디 가인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혼탁한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빛과 소금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법언처럼 항상 정의롭고 공정한 사법부가 되어 달라는 것이 국민의 바람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1.13.
국회법제사법위원장 박 영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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