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단편선> 성고문 고발장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8-01-04 14:45:21   조회: 363   
성고문 고발장

보도지침



5공화국

12.12 군사 쿠데타 세력은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비극적인 5.18 광주항쟁을 거쳐 제멋대로 5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5공화국은 군사독재 국가였다.

이름만 공화국인 경우 국가가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 악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국민을 짓밟고 억압하고 착취한다. 그러므로 국민에게 자행되는 폭력과 고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국가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은, 최루탄 가스와 전투경찰, 언론기관을 통제하기 위한 보도지침, 안기부가 주도하는 관계기관 대책회의, 군대 내 막강한 사조직인 하나회, 국가보안법 그리고 물고문과 전기고문, 고춧가루물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 성고문의 전성시대였다.

고문은 안기부 남산 지하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보안사 성남 분실, 경찰서 조사실에서 자행되었다.

1985년 여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 고문사건이 있었고, 1986년 여름에는 부천경찰서 조사실에서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이 있었으며, 1987년 1월에는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끝에 죽었던 것이다.


* * *


보도지침

군사독재 정권은 안기부의 지휘 아래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언론사에 대하여 이런 내용은 실어라, 이런 내용은 싣지 마라는 지시사항을 직접 전화 또는 문서로 전달하고 심지어 이 기사는 이런 제목으로 몇 단으로 실어라는 주문까지 했다.

이러한 주문을 그 당시에 보도지침이라고 불렀고 언론은 이 보도지침에 순응했기 때문에 제도 언론이라 불렀다.

그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는 신문사로 매일 한 두건씩 보도지침이 내려왔으니 1년 동안 모으면 오백 몇 십 건이 되었다.


198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사회부장, 담당 기자가 보도지침을 위반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안기부의 그 유명한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다.

안기부 국장급 간부가 말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인신 처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각하도 양해한 사실이다. 당신을 비행기에 태워 제주도에 가다가 바다에 떨어뜨려 버릴 수도 있고, 자동차로 대관령 깊은 골짜기에 데려가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

안기부 대공수사단 요원들은 기자를 청색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무차별 폭력을 퍼부었다. 주먹세례에 몸을 웅크리자 발길질을 하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급소를 제외하고 온몸을 동네 북치듯 두들겨 팬 뒤 발가벗기고 심문했다. 고문자들은 “취재원의 이름을 대면 지금이라도 내보내겠다.”며 때렸으나 기자는 끝까지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안기부장은 직접 고문 받는 현장에 나타나서 “이 새끼들 죽여 버려”라며 채근하고 돌아갔다.


1986년 6월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 보도와 관련하여 군사독재 정권이 보도지침을 통해 어떻게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천서의 ‘성폭행 사건’

현재 운동권 측의 사주로 인해 피해 여성이 계속 허위 진술.

검찰서 엄중 조사 중이므로 내주 초 사건 전모를 발표할 때까지 보도를 자제해 줄 것.

기사 제목에서 ‘성폭행 사건’이란 표현 대신 ‘부천 사건’이라고 표현하기 바람. (7월 10일)

⦁부천서 성폭행 사건, 검찰 발표 때까지 관련된 모든 기사를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부천 사건의 검찰 발표 시기에 관한 것이나 부천 사건의 항의 시위, 김대중의 부천 사건 언급 등 이와 관련된 일체를 보도하지 말 것. (7월 11일)

⦁부천 성고문 관계는 발표 때까지 일제 보도 자제 요망. 모든 보도를 자제할 것. (7월 12일)

⦁부천 성고문 사건은 계속 보도를 자제할 것. 오늘 기독교교회협의회(NCC) 등 6개 단체에서 엄정수사와 관련자 처벌을 촉구했는데 이 사실은 보도하지 말 것. (7월 15일)

⦁부천 성폭행 사건, 계속 발표 때까지 보도를 자제할 것.

성고문 고소장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7월 16일)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 (크기는 재량에 맡김). 검찰 발표 전문은 꼭 실어줄 것.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줄 것.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고 하지 말고 ‘성모욕 행위’로 할 것.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7월 17일)

⦁18일 오전 8시부터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NCC 인권위원회, 여성위, 구속자 가족 등이 공동으로 부천 사건 폭로 대회를 가질 예정. 이 내용은 보도하지 말 것.

부천 사건 변호인단 회견은 회견했다는 사실만 보도할 것.

신민당의 확대간부회의 결과와 의원 4명의 노 총리 방문, 항의한 사실은 조그맣게 실어줄 것. (7월 19일)

⦁범야권의 ‘부천 성폭행 사건’규탄 대회는 경찰 저지로 무산된 사실은 2단 이하로 조그맣게 싣고 사진 쓰지 말 것.

이 사건과 관련해 김수환 추기경이 피해 당사자인 권 양에게 편지 보낸 사실과 신민당 대변인의 집회 방해 비난 성명은 간략하게 보도할 것.

재야 5개 단체의 재수사 촉구 성명은 보도하지 않도록 할 것.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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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고문 고발장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작성한 것이다. 나는 그때 인천구치소의 변호사 접견실에 마주앉아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구치소는 언제나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하고 삭막하다.

조영래는 헝클어진 머리에 꾀죄죄한 흰 와이셔츠의 맨 위 단추를 푼 채 낡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앉아 그녀의 말을 메모하면서 가끔 그녀를 곁눈질로 흘낏 쳐다보았을 것이고, 그녀는 조영래의 무언의 독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때의 치욕적인 상황을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고개는 숙인 채 자주 머뭇거리며 겨우겨우 진술했을 것이다.

그녀는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게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히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자제력을 잃지 않았고 솔직할 수 있었다.

그해 6월 말경 또는 7월 초순의 어느 여름날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는지 아니면 그날따라 여린 안개비가 내렸는지는 지금 확인할 수 없다.

조영래는 법률가로서 잔인하리만치 치밀하게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그녀를 다그쳤음을 알 수 있다. 무거운 대화는 가끔가다 끊겼고 그럴 때면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뻔뻔하고 잔혹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었다. 그는 그때 귀를 의심하며 섬뜩한 이야기를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변호사는 의뢰인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인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게 불가능하였다. 그는 강인한 인상이지만 자주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부드럽고 연민에 가득 찬 시선으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변호사로서 직업윤리와 임무와 책임을 통감했다.

그녀는 1985년 당시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에 재학 중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경기도 부천시에 있던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인 ㈜성신에 위장취업을 한 권인숙이다.

이듬해 6월 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공문서 변조 혐의로 부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조사실에서 문귀동 경장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찌는 듯한 열기는 밤이 돼도 여전했다. 그녀는 사각형 창문을 쳐다보았고 어둠이 검은 벽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온몸에서 신열이 나고 머리가 멍해지며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쉬기조차 점점 힘들어졌다. 귀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사실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하루 종일 긴장이 계속되면서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뼈 마디마디가 쿡쿡 쑤신다.

병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사디스트. 꿈틀거리는 동물적 본능과 욕망. 가장 길었던 밤의 공포와 불안.

구속 수감. 좌절과 절망.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 욕설과 고함소리. 피의자 심문과 자백의 강요.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증오와 분노.

자살 충동.

그녀는 한 세대가 훌쩍 흘러갔지만 지금도 가끔은 생생하거나 흐릿한 악몽 속에 그 순간이 나타날 것이다. 꿈은 속이고 악몽은 종이라고 했다. 악몽은 악마가 야기하는 꿈인 것이다.

그 악마는 늙고 나이 들어 어느새 온갖 고통과 죄책감, 모진 질병으로 일그러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고발장을 제멋대로 요약 또는 축약할 수가 없었다. 가감 없이 고발장을 전재한다.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생생해서 숨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했던 걸 기억한다.


성고문 고발장


1. 우리는 공문서위조 피의사건으로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중인 권 양의 변호인들로서, 권 양을 접견한 후 풍문으로 전해 들은 성고문 행위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놀라움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저 나치즘 치하에서나 있었음직한 비인간적인 만행이 이 땅에서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경악과 공분을 느낌과 아울러 인간에 대한 믿음마저 앗아가는 듯한 암담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단순히 충동적인 음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성이 고문의 도구로 악용되어 계획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우리는 사건의 실상을 확인하고서도 계속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변호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마저 포기하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이 사건 관련자를 고발하여 처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2. 고발내용

6. 4. 밤 9시경 집에서 형사들에 의해 부천서로 연행되어 4층 공안 담당실(?)로 가서 그 다음 날인 6. 5. 새벽 3시경까지 조사를 받았다.

권 양의 혐의사실에 대한 조사 외에도 양승조 등 인천사태 수배자들 중 지면관계가 있거나 소재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집요하게 캐물었다.

6. 5. 아침 9시경 1층 수사계 수사실로 끌려갔다.

정오도 경사가 권 양에 대한 수사를 담당키로 되어 4층 420호실(421호실인지도 모른다)로 데려갔다.

이때부터 오후 6시경까지 공문서 (주민등록증) 위조 혐의와 수배자에 관한 조사를 받고 보호실로 가서 하룻밤을 잤다.

6. 6. 새벽 4시에 누군가가 데리러 와서 상황실로 데려갔다.

이때 부천경찰서에 무슨 비상이 걸린 모양으로 형사들이 다들 이미 출근해 있는 상태였다.

서장이 권 양을 보더니 “권 양이 수사에 너무 협조를 안 하는 군”하고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수사에 너무 협조를 안 한다는 것은 형사들이 권 양에게 인천사태 수배자들 (대부분 인천노동운동연합 관계자들)의 명단을 대면서 그 중에서 아는 사람이 있는지 여부를 묻고 특히 인천노동운동연합 양승조 위원장을 알고 있거나 또는 양승조를 아는 사람이라도 알고 있는지를 캐물었는데, 권 양이 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있는데도 협조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서장이 밖으로 나간 후 상황실장 (눈이 크고 약간 튀어나온 듯한 인상, 당시 전투복을 입고 ‘상황실장’이라는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이 말하기를 권 양이 너무 말을 안 하는데 아무래도 지금까지 조사과정에서 나온 사람들 (인천사태 수배자들을 지칭하는 듯함)과 한 팀이 아니냐고 하면서 형사 문귀동 (‘문기동’인지도 모른다. 형사들이 ‘문 반장’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얼굴은 검은 편, 입술이 두껍고 눈이 매서운 험악한 인상, 키는 보통, 나이는 35-36세 정도로 보이고 말씨는 서울말씨, 스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 예전에 ‘부평’에 있었다고 함, 이하 일응 ‘문귀동’이라고 부른다)을 보고 “문귀동, 자네가 맡아서 해보게”하면서 수사를 지시했다.

이에 문귀동은 권 양을 1층 수사계 수사실 (‘조사실’인지도 모른다)로 데리고 가서 새벽 4시 30분경까지 사이에 걸쳐 아래와 같이 추잡한 성고문 (‘1차 성고문’이라 부른다)을 자행하였다.


(1) 우선 문귀동은 권 양에게 “네 죄는 정책변화로 풀려날 죄도 아니고 하니 수배자 중에서 아는 사람을 불어라, 불기만 하면 훈방하겠다”고 강요하였다.

권 양이 끝내 모른다고 하자 문귀동은, “이년 안 되겠군”하고 운을 떼면서 “나는 5. 3. 사태 때 여자만 다뤘다. 그때 들어온 년들도 모두 아랫도리를 발가벗겨서 책상에 올려놓으니까 다 불더라, 네 몸 (자궁)에 봉 (막대기를 지칭한 듯하나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른다)이 들어가면 안 불겠느냐”고 협박하였다.


(2) 권 양이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으니까 문귀동은 권 양에게 옷을 벗으라고 강요하였다.

권 양이 상의 겉옷 (자켓)과 남방만을 벗고 티와 브래지어 및 바지를 입은 채로 있자 문귀동은 다른 형사 1명 (젊고 직급이 낮은 듯함)을 불러들여 옆에 서 있게 한 후 스스로 권양의 바지 단추와 지퍼를 풀어 밑으로 내리면서 “너 처녀냐? 자위행위 해본 적 있느냐?”고 묻고 브래지어를 들추어 밀어 올리면서 “젖가슴 생김으로 보니 처녀가슴 같지가 않다”고 하는 등 더러운 수작을 하면서 곧 이어 제발 살려 달라는 권 양의 애원을 뿌리치고 권 양의 바지를 벗겨 내렸다.


(3) 이에 권 양이 극도의 굴욕감과 수치심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여 엉겁결에 한 친구 (노동현장 취업과정에서 사귀게 된 이 모라는 여성으로 그 이름이 본명인지 여부도 모른다. 인천사태와 관계없는 사람임)의 이름을 대자 문귀동은 권 양에게 그 친구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적으라고 요구하였다.

권 양이 위 이 모양의 인적사항에 대하여 자세히 모른다고 하자 문귀동은 옆에 서 있던 형사에게 “고춧가루 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후 권양에게 책상 위로 올라가라고 하면서 “기어이 자궁에 봉을 집어넣어야 말하겠느냐”고 협박하였다.

권 양이 위 이 모양이 자취하던 집이라는 곳의 위치를 적어 넣자 문귀동은 그제서야 일단 수확을 거두었다는 듯 조사를 중단하고 권 양의 바지 지퍼를 올리게 했으나 그러면서도 다시 “진짜 처녀냐”고 물었다.


(4) 뒤이어 대공과 형사들이 권 양에게 수배자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위 이 모양이 수배자들 중의 하나가 아닌지를 확인하였다. 그 후 권양은 보호실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잤다.

6. 7. (토요일) 아침 7시경 문귀동이 다시 권 양을 데리고 가서 “너 양승조 안다고 그랬지?”라고 물어, 모른다고 대답하자 “더 아는 사람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몇 번 다그치더니 돌려보냈다.

아침 9시경 누가 권 양을 데리러 와서 1층 수사과로 갔는데 가 보니 상황실에 상황실장, 정오도 경사, 문귀동 등 10여 명의 형사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권 양이 일러준 대로 이 모양의 자취하던 집이라는 곳을 방문해 보니 그런 사람이 자취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면서 집주인 여자를 권 양과 대질시켰다.

대질신문 결과 그들은 권 양이 이제까지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판단, 경사 정오도가 권 양을 한 대 후려쳤고 상황실장은 권 양에게 “앞으로는 이제까지 대우한 것과는 달라질테니 이따가 오늘 저녁에 두고 보라”라고 협박하면서 옆에 있던 문귀동을 보고, “저녁 때 그런 방법으로 조사해”라고 지시하였다.

문귀동이 권 양을 다시 보호실로 데려가면서 “네가 이제까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니 그냥 안 두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날 낮 내내 권 양은 보호실에서 대기하면서 불안과 초조에 떨었고 한시바삐 검찰청으로 송치되기만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수감자들에게 물어 본 결과 여기서 한 열흘쯤 있어야 검찰청으로 넘어간다는 절망적인 대답을 들었다.

밤 9시경 문귀동이 다시 권 양을 1층 수사과 조사실 (문귀동이 조사하는 방의 옆방)로 불러냈다.

당시는 수사과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였고 청내는 모두 불이 꺼진 상태였으며 조사실 역시 불이 꺼져 있었는데 다만 건물 바깥에 있는 등에서 나오는 외광에 의해 방안의 물체를 어렴풋이 식별할 수 있는 정도였다.

문귀동은 토요일 밤에 퇴근도 못하고 “일”을 해야 된 데 무척 화가 난 듯 권양에게 “독한 년”이라고 하면서 “남들은 다 퇴근했는데 네 년 때문에 한밤중에 또 조사를 해야 된다. 위에서 그년 되게 악질이니 족치라고 했다”라고 겁을 주고 나서 다른 (남자)형사 2명을 불러들여 권 양의 양 팔을 등 뒤로 돌려 놓은 상태로 양 손목에 수갑 (이른바 ‘뒷수갑’)을 채우게 하고 그 자세로 무릎을 꿇려 앉힌 후 안쪽다리 사이로 각목을 끼워 넣고 넓적다리와 허리 부위 등을 계속 짓밟고 때리게 하면서 권 양에게 이 모양의 본명과 출신학교, 사는 집 등을 불도록 요구했다.

이로 인하여 권 양의 넓적다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퉁퉁 부었다.

권 양이 고통과 공포를 참지 못하여 비명을 지르자 문귀동은 “이년이 어디서 소리를 꽥꽥 지르느냐, 소리 지르면 죽여 버리겠다. 너 같은 년 하나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윽박 질렀다.

뒤이어 문귀동은 권 양에게 수배자 중 아는 사람을 대라고 추궁하다가 계속 모른다고 하니까 옆에 있던 형사에게 고문기구를 가져오라고 소리쳤고, 그 형사가 검은색 가방을 가져오자 불을 켜더니 인천노동운동연합 소속 수배자 20명의 인적사항과 사진 등이 편철되어 있는 서류철을 꺼내어 한 장씩 넘기면서 아는 사람을 대라고 다그쳤다.

권 양이 모른다고 하자 문귀동은 “이년 안 되겠다”고 하면서 형사들을 내보내더니 권 양을 조사실 옆에 있는 자기 방 (양쪽이 창문으로 되어 있음)으로 데리고 갔다. 이때가 밤 9시 30분경으로, 이때부터 밤 11시경까지 약 1시간 반 동안에 걸쳐 문귀동은 인면수심의 실로 천인공노할 야만적 추행을 저지르면서 권 양을 고문하였다.

이 한 시간 반 동안, 방 안에는 계속 불이 꺼져 있었고 권 양은 계속 뒷수갑을 찬 채로 문귀동과 단 둘이 약 2평 정도의 방 안에 남아 있었으며 주위에서도 전혀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문귀동이 저지른 추행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먼저 권 양에게 아버지가 뭘 하느냐고 물어 권 양이 식당을 한다고 거짓 대답하자 (권 양의 아버지는 법원 서기관인데 권 양이 공무원 신분에 영향이 있을까봐 걱정이 되어 거짓 대답한 것임) 문귀동은 비시시 웃더니 “간첩도 고문하면 다 부는데 네 년이 독하면 얼마나 독하냐”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권 양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였다.

권 양이 웃옷만을 벗자 문귀동은 권 양에게 다시 뒷수갑을 채운 후 브래지어를 위로 들어 올리고 바지를 풀어 지퍼를 내리더니 권 양의 국부에 손을 집어넣었다. 권 양이 비명을 지르자 소리 지르면 죽인다고 하면서 윽박 질렀다.

(2) 권 양의 팬티마저도 벗겨 내리고 의자 두 개를 서로 마주보는 상태로 놓고 권 양을 한쪽 의자 위에 수갑 찬 손을 의자 뒤로 돌린 상태에서 앉게 하고 문귀동 자신은 맞은 편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그 위에 앉아 권 양의 몸과 밀착된 자세를 취한 다음 계속 수배자의 소재를 불 것을 강요하였다.

권 양이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애원하였으나 문귀동은 들은 척도 않고 “너 같은 년 하나 여기서 죽어도 아무 일 없다”고 협박하였다.

이때부터 문귀동은 수시로 권 양의 젖가슴을 주무르고 국부를 만지며 권 양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대었다.

(3) 그 후 문귀동은 권 양을 일으켜 세워 바지를 완전히 발가벗기고 윗도리 브래지어를 밀어 올려 젖가슴을 알몸으로 드러나게 해놓은 상태에서 뒷수갑을 찬 채로 앞에 놓인 책상 위에 엎드리게 한 후 자신도 아랫도리를 벗고 뒤쪽에 붙어서서 자신의 성기를 권 양의 국부에 갖다 대었다 떼었다 하기를 몇 차례에 걸쳐 반복하였다.

이때 권 양이 절망적인 공포와 경악과 굴욕감으로 인하여 거의 실신상태에 들어가자 문귀동은 권 양을 다시 의자 위에 앉히더니 담배에 불을 붙여 강제로 몇 모금을 빨게 하였다.

(4) 잠시 후 문귀동은 권 양을 의자 밑으로 난폭하게 끌어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하고 앉힌 후 자신은 의자에 앉아 권양이 자신의 성기를 정면으로 보도록 하는 자세로 조사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문귀동은 권 양의 얼굴을 앞으로 잡아당겨 입이 자신의 성기에 닿도록 하면서 자신의 성기를 권 양의 입에 넣으려 하다가 권 양이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까 난폭하게 권 양의 몸을 일으켜 세운 후 강제로 몇 차례 키스를 시도하였다.

권 양이 입을 벌리지 않고 고개를 돌리니까 문귀동은 입을 권 양의 왼쪽 젖가슴 쪽으로 가져가더니 유두를 세차게 빨기를 두어 차례에 걸쳐 하였다.

(5) 그 후 문귀동은 다시 권 양을 책상 위에 먼저번과 같은 자세로 엎드러지게 해 놓고 뒤쪽에서 자신의 성기를 권 양의 국부에 몇 차례 갖다 대었다 떼었다 하는 짐승과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끝에 크리넥스 휴지를 꺼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것으로 권 양의 국부를 닦아내고 옷을 입혔다.

이 때가 밤 12시경.

(6) 위와 같은 짐승과 같은 동작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문귀동은 집요하게 권 양에게 아는 수배자의 이름을 대라고 강요하였고 권 양이 비명을 지르면 죽이겠다고 하면서 윽박 질렀다.

또 위와 같은 동작을 하는 중간 중간에 문귀동은 권 양을 서너 차례 정도 쉬게 하면서 억지로 불 붙인 담배를 입 속에 밀어 넣고 물을 마시게 하였으며, 그리고 나서는 다시 갖은 협박을 하면서 수배자에 관한 추궁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에 권 양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의 집에 찾아왔던 어느 여성 한 사람의 이름과 동인이 종전에 다니던 회사의 이름을 댔으며 문귀동은 권양이 말한 내용을 종이에 쓰게 하였다.

위와 같은 추악한 만행을 저지른 후 문귀동은 권양에게 호언하기를 “네가 당한 일을 검사 앞에 나가서 얘기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검사나 우리나 다 한 통 속이다.”라고 하였다.

밤 11시가 지나 문귀동은 기진맥진해 있는 권 양을 보호실로 데리고 가서 권 양의 소지품을 챙기더니 유치장으로 끌고갔다 (이때 권 양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된 상태였음).

일반적으로 유치장에 처음 입감될 때는 몸수색을 위하여 속옷을 벗게 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때 문귀동은 여교관을 부르더니, “내가 다 봤으니 몸 검사는 필요 없다. 독방을 주어라”고 지시하고는 돌아갔다.

그 후 권 양은 검찰에 송치되기까지 유치장에서 열흘 간을 보냈는데 한 동안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고 먹으면 계속 체했으며 밤에는 악몽에 시달리느라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몇 차례나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이 엄습해왔으나, 점차로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전도를 희생해서라도 이와 같은 끔찍한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가 굳어지면서 가까스로 자살충동을 이겨내었다.

6. 16. 교도소로 옮겨온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권 양은 계속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원주법원의 서기관으로 재직하던 권 양의 부친은 이 사건의 충격으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권 양의 소식이 인천교도소 내의 재소자들에게 알려지면서 교도소 내 양심수 약 70명이 문귀동의 구속 등을 요구하는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권 양 자신도 6. 28.부터 시작하여 7. 2. 현재까지 닷새째 단식을 계속하여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3. 이상이 국가권력의 집행자인 경찰에 의하여 저질러진 저 전대미문의 추악한 성폭행고문에 관하여 피해 당사자인 권 양이 변호인들 앞에서 밝힌 내용의 개요이다.

우리는 권 양의 진술태도나 기타 모든 정황으로 보아 위 내용이 진실인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는 이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천인공노할 만행이 다른 곳도 아닌 경찰서 안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관에 의하여 저질러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실로 경악과 전율을 금치 못한다.

더욱이 이 같은 만행이 인권옹호 직무수행자라는 검찰에까지 상세히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범인이 아직까지도 버젓이 경찰관 신분을 유지하면서 바깥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데에 이르러서는 이 나라에 과연 법질서라는 것이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를 근본적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최고학부까지 다닌 한 처녀가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러울 저 끔찍한 강제추행을 당한 사실을 스스로 밝힌 이상 그밖에 또 무슨 “증거”가 필요해서 수사를 못한다는 말인가? 경찰서 안에서는 목격자만 없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다는 것인가? 검찰이 경찰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하여 이와 같이 수수방관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무고한 시민들이 경찰권력의 횡포 아래 희생되는 것을 막을 길도 전혀 없게 된다.

이 사건의 진상이 철저히 규명되고 직접 범행을 저지른 자는 물론 관계 책임자들이 모두 엄중히 처단되지 않는 한, 이후 여성들은 경찰서 앞을 지날 때마다 공포에 질리게 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필설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면서 먼저 저 인간의 탈을 쓰고서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패륜을 저지른 문귀동을 고발한다. 피고발인 상황실장, 성명불상자와 경찰서장 옥봉환은 제반 정황으로 보아 문귀동의 범행에 공모, 가담하였거나 교사, 방조하였거나 또는 적어도 이를 알면서도 묵인, 방치하고 단속하지 아니하였음이 명백하다고 인정되므로 아울러 고발한다. 피고발인 형사 성명불상자 3명 역시 문귀동의 범행에 공모, 가담 또는 방조한 혐의로 고발한다.

이 사건을 그대로 두고서는 실로 인간의 존엄성이니 양심이니 인권이니 법질서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을 입에 올리기조차 낯 뜨겁다.

우리들 고발인 일동은 문귀동을 비롯한 피고발인들 전원이 지체 없이 의법처단되지 않는 한 이 사건에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고 모든 합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기어이 고발의 실효를 거두도록 총력을 기울일 결의임을 천명한다.



4. 우리는 귀청이 이 사건을 수사함에 있어서 다음 몇 가지 점에 유의하여 줄 것을 촉구한다.

첫째, 이 사건은 문귀동이라는 변태성욕에 사로잡힌 한 개인에 의하여 우발적인 충동으로 저질러진 단독범행이 아니고 경찰권력 조직 내부의 의도적인 성고문 계획에 따라 자행된 조직범죄임이 명백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귀청이 이 끔찍한 조직범죄의 전모를 낱낱이 파헤쳐 이 범죄가 어느 선에서부터 계획되었는지를 밝히고 피고발인들 외에도 일체의 관련자들을 남김없이 의법처단하여 주기를 강력히 요청한다.

둘째, 피고발인들의 소행은 강간죄 내지는 강제추행죄로 의률될 수 있음은 물론이나 이 점은 친고죄이므로 이 고발에서는 제외하였고 다만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의 폭행 및 가혹행위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들어 고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이 종래에 흔히 볼 수있던 통상의 고문, 가혹행위 수법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인간적 파괴를 노리고 반인륜적인 성고문 수법을 사용한 범행이며 더욱이 피의사실에 관한 조사가 아닌 단순한 수배자의 검거를 위한 수단으로 이와 같이 끔찍한 범행이 자행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우리는 1984. 9. 4. 에도 청량리경찰서에서 경희대 여학생들이 경찰서 전경들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인천 5. 3. 사태로 구속된 피의자의 가족이 자기 딸도 부천 경찰서에서 권 양과 비슷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을 들은 바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위 주장도 사실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고, 특정서에서 성이 고문의 수단으로 제도화되어 악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고 있는 민주법치국가에서 위와 같이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만행이 제도적으로 자행된다는 것은 더 이상 묵과될 수 없다.

이 사건을 최단시일 내에 철저히 수사하여 그 진상을 백일하에 드러냄으로써 검찰이 추호라도 이 사건을 은폐하거나 비호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1986년 7월 5일



* * *



5공화국 시절 검찰은 꼼짝없이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관계기관 대책회의는 언론에 대해서는 보도지침을 하달하여 언론을 통제했고 검찰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통해 직접 통제 압박하면서 이 사건을 철저히 축소 은폐하였다. 박종철 사건의 축소 은폐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성고문을 날조이며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다고 매도하였고 공안 당국으로부터 보도지침을 하달받은 제도 언론은 ‘성적 수치심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여론을 호도하려 들었다.


인천지검 보도자료

부천경찰서 수사시비사건 수사결과


1. 수사경위

• 인천지방검찰청은 타인의 주민등록증을 절취, 자신의 주민등록증으로 변조하여 부천시 소재 주식회사 성신에 위장취업한 사실과 관련하여 절도죄와 공문서 변조죄 등으로 인천소년교도소에 구속되어 있던 권○○으로부터 자신이 부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 부천경찰서 수사과 근무 문귀동 경장으로부터 폭행과 성적 모욕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고소장을 86. 7. 3. 접수하고 문귀동으로부터도 86. 7. 3. 권○○이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내용의 고소장과 7. 5. 허위고소로 무고하였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각각 접수하여

• 86. 7. 3. ∼ 7. 16.까지 동 고소사실들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집중수사를 전개하였음.

• 인천지검은 그 동안

- 사건 당사자인 위 문귀동을 7회, 권○○을 8회 소환, 조사하였고

- 관련 참고인 43명을 소환, 진술을 들었으며

- 또한 사건현장에 대한 면밀한 실황조사를 실시하는 등 가능한 모든 조사를 실시하였음.



2. 수사결과

• 권○○의 고소사실 중 86. 6. 7. 21:00-23:00 사이 문귀동이 권○○을 조사하면서 성적 모욕행위를 가했다는 부분은

- 문귀동이 조사를 행한 조사실은 2면 벽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안이 들여다보이고 조사실 뒷편에 있는 무기고의 전등불빛이 조사실 안으로 비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바로 옆의 조사실에서도 다른 경찰관들이 날씨가 더워 모두 문을 열어 놓은 채 다른 피의자를 조사하연서 문귀동의 조사실 앞을 왔다갔다한 사실이 있었으며

- 또한 권○○과 함께 부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최 모 여인(32세), 박 모 여인(30세) 둥도 참고인 진술에서 조사받고 권○○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은 유치장에서 한 일이 있으나 성적 모욕을 당했다는 말은 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고 옆 조사실에서 조사를 한 경찰관 깅해성, 권오성, 박경천 등도 그와 같은 사실을 목격하거나 감지한 바 없다고 진술한 점 등에 비추어 사실로 인정할 수 없음.

• 그러나 권○○의 고소사실 중

- 86. 6. 6. 04:00∼06:30. 문귀동이 제5조사실에서 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천소요사건 관련수배자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아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대라고 거듭 요구했으나 권○○이 완강히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자 권○○에게 자켓을 벗게한 후 티샤스를 입은 가슴부위를 손으로 3~4회 쥐어박아 폭행을 가한 사실과

- 89. 6. 7. 21:00~23:00. 문귀동이 부천경찰서 제2조사실에서 같은 내용을 조사하던 중 권○○이 전일과 마찬가지로 계속하여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자 권○○에게 또 다시 가슴부위를 손으로 3~4회 쥐어박아 폭행을 가한 사실 등은

- 문귀동이 자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타 증거에 의하여 사실로 인정됨.


3. 처리


• 이상과 같이 권○○의 고소사실 중 성적모욕행위 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폭언, 폭행 부분은 일부 사실이 인정됨.

• 폭언. 폭행 부분은 문이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저지른 우발적인 과오로서 이로 인해 이미 파면 처분을 받았으며

• 문귀동은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면서 성실하게 근무하여 왔고,

• 현재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있으므로 검찰은 이와 같은 정상을 참작 문귀동을 기소유예 처분할 방침임.


사건의 성격

• 급진좌경사상에 의한 노학연계투쟁을 전개해 왔던 권○○의 ‘성적모욕’의 허위사실 주장은 운동권 세력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소위 의식화투쟁의 일환으로서

• 폭행사실을 성 모욕행위로 날조,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구명과 아울러 일선 수사기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반체제 혁명투쟁을 사회일반으로 확산시켜 정부의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로 판단됨.

• 이러한 사실은 동 권○○이 학원 의식화투쟁을 벌이다가 성적불량으로 대학 4년 제적 후 (서울대 가정대 의류학과), 부모의 권유도 뿌리치고 가출한 후 위장취업으로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 반정부, 반체제 투쟁활동을 전개한 전력을 볼 때에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음.


1986. 7. 16


인천지방검찰청



* * *



事必歸正

부천경찰서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은 박종철 물고문 사건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그녀는 부천경찰서에 연행된 뒤 자신에 대한 혐의와는 상관없는 5.3 인천사태 관련자의 소재를 추궁당하는 과정에서 담당 형사인 문귀동 경장에게 2차례에 걸쳐 성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 당시 공문서 변조 및 동 행사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던 권인숙은 조영래 등 변호사의 도움을 얻어 1986년 7월 3일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하였고, 다음날 문귀동은 명예훼손 혐의로 권인숙을 맞고소하였다. 그러자 권인숙을 변호했던 인권변호사들은 문귀동과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독직 · 폭행 · 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고발하였고, 문귀동은 다시 권인숙을 무고 혐의로 맞고소하였다.

그때 인천지검은 어처구니없게도 ‘성적 모욕이 없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문귀동을 기소유예 처분하였다. 이 무렵 관계기관 대책회의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이때 검찰은 대책회의의 지시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였다) 공안 당국은 권인숙이‘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1986년 9월 검찰의 문귀동에 대한 기소유예 처분에 대해 변호사들은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민사지방법원에 국가를 상대로 하여 성고문과 조작은폐 기도에 대한 정신적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판사들은 허약했고 비겁했다.

성고문 피해자인 권인숙에게는 공문서를 변조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하였으나 성고문 가해자인 문귀동에 대해 재수사를 요청하는 재정신청은 기각하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5공화국 군사독재 정권이 막을 내렸다. 이제 6공화국이 시작된 것이다. 그제서야 대법원은 재항고를 받아들여 1988년 1월 29일 문귀동의 성고문사건을 인천지방법원이 재판토록 하는 결정을 내렸고, 문귀동은 결국 1988년 4월 9일 구속되어 같은 해 7월 23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위자료 지급 청구소송에서는,‘국가는 권인숙에게 성고문사건으로 인한 위자료로 금 4천만 원을 지급하라’는 승소판결을 내렸다.



그 당시 권인숙 양 관련 형사사건과 민사사건에서 끝까지 고군분투했던 조영래 (1947~1990년) 변호사는 폐암으로 일찍 죽었다. 권인숙 양은 홍성우 변호사의 주례로 결혼했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지금 (2017년 10월 현재)은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와 제15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프리모 레비
2018-01-04 14:45:21
14.xxx.xxx.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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